[창-김미나] 불시착 기사의 사진

이전이미지다음이미지

나는 지금 중국의 한 도시에 불시착했다. 원래 이 시간쯤이면 한국에 무사히 도착했어야 하는데…. 다른 나라에 사는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1년 만에 떠난 4박5일 여행이었다.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아쉬움을 뒤로한 채 비행기에 오른 시간이 오전 9시30분. 활주로에 멈춰선 비행기는 꼼짝하지 않았다. 해 질 녘 경유지인 이곳에 나를 던져 놨다. 내게 잘못이 있다면 잦은 연착으로 악명 높은 이 중국 항공사를 택했다는 것. 저렴한 요금에 수화물도 많이 실을 수 있어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거기서부터 내 인생 최악의 휴가가 시작된 것일까.

인천으로 가는 연결 편은 이미 다 떠나간 시간. 항공사 직원은 “오늘은 더 이상 스케줄이 없다”고 말했다. 그 말투가 자못 퉁명스러웠다. 한 대 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스친 것도 잠시, 낯선 공항에서 혼자 밤을 새워야 한다는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오늘 집에 꼭 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일까. 딱 한 자리 남은 내일 아침 비행기 티켓을 겨우 건네받았다.

오늘 밤 묵을 숙소를 구해주겠다는 말만 믿고 공항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중국인 J와 말을 텄다. 그도 비슷한 처지였다. 미국에서 영화를 전공한 J는 졸업 후 일자리를 찾기 위해 베이징으로 가다 이곳을 경유하게 됐다. 커다란 여행 가방이 고단한 유학생활을 말해주는 듯했다. J는 머쓱했는지 모든 중국 항공사가 이런 건 아닐 거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겨우 공항을 빠져나와 흰색 15인승 승합차에 올라탔다. 부와 성공을 뽐내기라도 하듯 마천루가 솟은 이 도시. 하지만 승합차는 밭을 따라 말없이 달릴 뿐이었다. 아스팔트를 깔고 있는 인부를 무심코 스쳐 지나갔다. 자동차와 자전거, 오토바이가 경주를 벌였다. 중앙선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핸들은 수차례 급하게 꺾였다. 어렸을 때 본 중국산 누아르 영화가 떠올랐다. 손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사실 이번 휴가는 처음부터 심상치 않았다. 비행기 출발을 불과 10시간 앞둔 새벽 2시. 쉴 새 없이 울린 문자메시지에 잠에서 깼다. ‘항공사 사정으로 비행기 출발이 4시간 지연됐다.’ 일방적인 통보였다. 그렇게 되면 연결 편을 못 타게 되는데…. 비상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대뜸 중국어가 흘러나왔다. 그렇다. 중국 콜센터였다. 그 새벽 전화기를 붙잡고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수화기 너머도 나만큼 난처했으리라. 겨우 이른 비행 편을 구했지만 밤을 새우고 졸린 눈을 비비며 집을 나서야 했다.

무심한 승합차는 한참을 달려갔다. 창밖에는 불빛 하나 없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운전사는 모기를 쫓으려고 이따금 손을 흔들 뿐이었다. ‘만만디’란 말이 떠올랐다. 그렇게 15분쯤 지났을까. 도착한 곳은 이즈호텔(Ease Hotel). 이름처럼 편안할까. 반쯤 불안한 마음으로 로비에 발을 들였다. 역시나 이름만 호텔이었다. 2층 8211호. 방 열쇠를 받아들고서도 애를 먹었다. 다음 날 공항 가는 시간을 말하느라 손짓 발짓을 총동원했다. 호텔 직원은 영어 9와 10을 구분하지 못했다. 끼니라도 챙겨주겠다는 말에 따라간 식당에선 찐만두 17개를 배급받았다. 소박한 만두가 내뿜는 온기가 지친 마음을 달래줬다. 조금씩 ‘무장해제’되는 느낌이었다. 짜증 섞인 긴 하루가 차츰 받아들여졌다. 그렇게 허기를 달래고 씻었다. 수도꼭지를 아무리 비틀어도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았다. 뜨거울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샤워기 옆 경고 문구가 무색했다. 그런데 왠지 이불 속이 더 포근하게 느껴졌다.

주변엔 불빛을 쏟아내는 건물이 하나도 없었다. 벌레를 쫓는 홈매트가 향을 피웠다. 밖에선 개 짖는 소리와 비행기 뜨는 소리가 절묘한 하모니를 이뤘다. 문득 이 뜻밖의 하루가 꽤 황당해서 웃음이 났다. 순간, 여기가 어딘지 가늠할 수 없게 됐다. 어쩌면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남미의 어느 산골, 아프리카 어느 사막에 불시착한 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에 이르렀다.

왜 우리는 여행을 꿈꿀까. 어찌할 수 없는 순간을 경험하고, 평소의 나를 조금은 내려놓는 것도 여행의 한 묘미일 테다. 덤으로 하루 더 주어진 휴가라고 좋게 생각하자. 맘을 토닥이며 휴대전화 속 사진첩을 들춰봤다. 언젠가 찍어둔 책의 한 구절이 들어왔다.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그래. 이번 여행도 내게 크고 새로운 생각을 던져주겠지. 그나저나 내일은 포근한 내 침대에 누울 수 있을까. 김미나 국제부 기자 mina@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