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박재찬] 연약하고 불완전한 기사의 사진
박춘애(70) 할머니는 지금 영국 런던 세인트메리 병원에 입원 중이다. 지난 3월 22일 런던 의사당 인근에서 발생한 차량 테러로 5명이 숨진 그날, 현장 한복판을 거닐던 박 할머니는 돌진하는 테러범의 차량에 튕겨 나가면서 돌바닥에 머리를 세게 부딪쳤다. 두개골 절개와 봉합 등 수술을 세 차례나 했다. 경북 영천에서 과수원 농사를 짓다가 칠순 기념으로 남편과 함께 패키지여행에 나섰다가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나’ ‘하나님도 참 무심하시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터질 때마다 무심코 던지는 말들 속에서 연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의 속성과 마주친다.

일상 풍경에선 인간의 또 다른 특성도 접한다. 가정과 직장, 교회, 얽히고설킨 인간관계 등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 같다. ‘내가 이 정도로 베풀었으면 그 사람도 좀 내놔야 하는 거 아냐’ ‘기도를 오래했는데도 응답이 없네’…. 소위 ‘인과법칙’에 길들여진 푸념을 늘어놓는 스스로를 곧잘 발견한다.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결심에 감춰진 무의식 속엔 조건을 만족시키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인과법칙이 도사리고 있다.’ 미국의 크리스천 상담심리학자 래리 크랩 박사의 저서 ‘네 가장 소중한 것을 버려라’(살림출판사)에 등장하는 이론이다.

인과법칙은 우리가 원하는 것(A)을 선택하고, 그걸 얻기 위한 그 무엇(B)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즉 B라는 전략이 A라는 목적을 이뤄준다는 논리다. ‘부자가 되는 7가지 법칙’ ‘인간관계를 돈독하게 만드는 십계명’ 같은 것들도 포함되지 않을까.

인과법칙, 또는 인과응보라는 삶의 법칙을 고수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삶의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심리적으로 수고가 너무 헛되고 힘들게 느껴질 뿐 아니라 우울증과 신경성 성격장애, 정신질환도 야기할 수 있다고 크랩 박사는 경고한다. 율법에 얽매인 채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성경 속 유대인의 모습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물론 성경에 등장하는 ‘심는 대로 거둔다’ 같은 진리의 문제와는 다른 차원이다. 많은 이들이 얽매이는 인과법칙은 더 나은 삶을 향한 욕구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크랩 박사의 핵심 메시지는 다소 성경적이다. “있는 모습 그대로 그분(하나님)께 나아가라”고 그는 조언한다.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아오라는 얘기는 곧 인간됨을 알아야 한다는 메시지다. 약하고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늘 잊지 말라는 교훈이기도 하다. 불가항력의 재난과 사고를 당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인과법칙으로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자세는 낮은 마음으로 신에게 의탁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로마서 1:17·쉬운성경).’ 500년 전 마르틴 루터를 통해 믿음에 대한 새로운 눈을 갖게 만든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바탕도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한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최근 개최된 동서신학포럼에서 루터의 이신칭의를 강조했다. 다시 말해 연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된 믿음이 무너져버린 우리 사회의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낯설고 물선 이국땅 병원에 누워 있는 박 할머니는 외롭지만은 않다. 재영한인교회연합회와 현지 교민들이 통역은 물론이고 간병, 성금 모금까지 자원봉사자로 묵묵히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경남 양산의 한 아파트에서 외벽 작업을 하다 입주민이 밧줄을 끊어버리는 바람에 추락해 숨진 김모(46)씨. 그가 고교 2학년생부터 27개월까지 5남매와 아내, 칠순 노모까지 모두 일곱 식구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이웃 주민은 물론 해외교포, 네티즌까지 나서 1억원 넘는 성금으로 힘을 보탰다. 연약하고 불완전한 인생의 위로와 희망은 거창한 데 있지 않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신 앞에 서는 마음, 이웃의 이름으로 조용히 손을 내미는 마음 정도 아닐까.

박재찬 종교부 차장 jeep@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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