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경식 <3> 재활원서 배운 수리기술로 전파사 열어

돈 벌면 장애인 쉼터 만들겠다 다짐, 사업 잘되고 돈 벌자 하나님 멀리해

[역경의 열매] 김경식 <3> 재활원서 배운 수리기술로 전파사 열어 기사의 사진
김경식 목사는 주변 장애인들의 현실을 보면서 보호시설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사진은 2009년 말부터 위탁운영 중인 진도군장애인종합복지관 전경. 임마누엘집 제공
우리 집은 가난했다. 그림자처럼 따르던 가난은 고등학교 과정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양말과 볼펜을 구입해 가가호호 방문하거나 버스를 타고 다니며 팔았다.

하루는 버스터미널 대합실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새벽 3시쯤 잠에서 깼는데 장애인과 불량배들이 만취해 쓰러져 있는 모습을 봤다. 그들은 속이 아프다며 바닥을 뒹굴었고 나는 그 모습이 안타까워 다가가 말을 건네기도 했다. 그때부터 이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특수한 선교사명을 달라고 기도를 시작한 것이다.

이 기도는 어느 날 한 장애인 가정을 방문하면서 구체화됐다. 휠체어를 타고 있던 그는 누군가 밀어줘야 움직일 수 있는 중증장애인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어떻게든 아들을 돌볼 수 있지만 죽고 나면 누가 돌보겠어”하며 딱한 사정을 털어놓았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언젠가는 장애인을 위한 시설을 만들어 보호가 필요한 장애인들을 돌보고 싶다는 꿈을 품게 됐다.

고등학교를 다 마치지 못한 나는 기술이라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부산의 한 재활원에서 시계와 TV 수리기술을 배웠다. 열심히 해서 돈을 벌면 소외되고 멸시받는 사람들을 모아 육신과 영혼의 쉼터를 만들 수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준비한 끝에 1976년 나는 고향 진도에 전파사를 개업했다. 당시엔 진도에서도 일부 동네에만 전기가 보급됐다. 이듬해가 되자 진도 전체에 전기가 들어왔다. 그러자 사람들이 가전제품을 사기 위해 몰려들었다. 하지만 전파사엔 제품이 부족했고 자본도 없어 더 들여올 수도 없었다. 나는 주님께 길을 열어달라고 기도했다.

그 무렵 4㎞ 떨어진 곳에서 조합을 운영하는 한 조합장이 자신의 녹음기를 가져와 고쳐달라고 했다. 딱 보니 일제 녹음기였다. 당시 내 기술과 경험으로는 힘들었다. 순간 기도했다. ‘하나님, 이 비싼 녹음기를 수리 못하면 무슨 창피입니까. 지혜를 주세요.’ 신기하게도 수리가 잘 됐다. 조합장은 만족했고 자기 조합의 가전제품을 가져다 팔아보라고 뜻밖의 제안을 했다. 결제는 연말까지 하면 된다는 말까지 하면서.

나는 뛸 듯 기뻤다. 기도가 응답되는 게 보였다. 사업은 번창했고 광주의 삼성대리점까지 담보 없이 물건을 공급해줬다. 사업은 날이 갈수록 호황을 누렸다. 나는 기도와 감사생활, 성수주일 등 신앙생활도 충실히 했다. 전파사를 개업한 지 3년 만에 큰 점포를 얻었고 기사 3명에 경리사원까지 두게 됐다.

돈이 생기자 지역 사람들도 나를 다르게 봤다. 모두가 사장님이라 부르며 깍듯이 대우했다. 지역 유지들은 수시로 모임을 열었다. 그 모임에 가면 소위 잘 나가는 사장들을 만날 수 있었기에 사업을 위해 참석했다. 자주 가서 어울리다보니 한두 잔씩 술을 마시게 됐다. 내 안에서는 안 된다는 소리가 들렸지만 ‘한 잔쯤은 괜찮아’하며 점점 기준이 무너졌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새 주일에도 일을 하게 됐다. 나는 교회 예배가 끝나기 무섭게 가게로 달려갔다. 나중엔 십일조 헌금도 아까웠다.

어머니는 이런 내 모습에 “하나님이 축복하셨는데, 너는 네 맘대로 산단 말이냐”하며 탄식하셨다. 나는 그때마다 “괜찮아요, 어머니”하고 답했다. 장애인 재활시설을 세우겠다는 꿈도 연기처럼 사라졌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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