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경식 <5> 도봉산 밑에 천막 치고 장애인들과 공동생활 시작

볼펜·양말·껌 팔아 식구들 10명 부양… 먼저 팔던 이들 “다신 오지 말라” 구타

[역경의 열매] 김경식 <5> 도봉산 밑에 천막 치고 장애인들과 공동생활 시작 기사의 사진
김경식 목사는 1983년 천막을 치고 임마누엘집을 세웠다. 김 목사(왼쪽 뒤편 안경 쓴 이)와 장애인들 모습. 임마누엘집 제공
날씨가 풀리고 봄기운이 솟아나자 이제는 정말 뭔가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고교 시절 볼펜과 양말을 판매해 본 경험을 살려 다시 일을 시작했다. 물건을 외상으로 구입해 이곳저곳을 다니며 팔았다. 가는 곳마다 인정이 넘쳐 물건을 많이 팔았다. 웃돈을 얹어주는 분들도 있었다.

그렇게 5개월 동안 한 푼 두 푼 모았더니 100만원이 넘었다. 천금보다 값진 이 돈으로 나는 꿈꿨던 계획을 실행했다. 서울 도봉산 밑 안골부락에 허름한 집을 얻어 그 옆에 천막을 치고 장애인 10명과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장애인들은 내가 노숙하며 만났던 사람들이었다. 지체와 뇌성마비 장애인이었다. 서울역과 용산역, 청계천 등지에서 노숙하면서 추위를 피하고 먹을 곳을 찾던 사람들이었다. 1983년 2월 10일 임마누엘집은 그렇게 시작됐다.

우리는 매일 아침 예배로 하루를 시작했다. 뜨겁게 기도하며 하나님께 의지했다. 도봉산 자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매서웠다. 임마누엘집 식구들은 감기를 달고 살았다. 코에서 콧물이 줄줄 흘렀다. 서로 콧물을 닦아주느라 웃기도 했다.

예배를 마치면 나는 볼펜과 양말, 껌을 팔러 나갔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열 식구가 먹고 살기는 힘들었다. 누군가 버스 세일이 괜찮다 해서 버스터미널을 찾아갔다. 처음엔 입술이 떼어지지 않았다. 학창 시절 교내 웅변대회에서 최우수상을 탄 적도 있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서울 마장동 시외버스터미널로 갔다. 그리고 출발 시간을 기다리는 버스에 올라 말했다. “명랑한 여행을 준비하시는 승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 볼펜이 왔습니다. 5개를 500원에 드립니다.” 막힘없이 이야기를 했다. 호응도 컸다. 10분 만에 30여개가 팔렸다. 장사가 잘될 때는 하루 10만원까지도 벌었다.

그런데 이런 나의 행동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원래 마장동 버스터미널에서 터를 잡고 물건을 팔던 사람들이었다. 하루는 나를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더니 물건과 돈을 빼앗았다. 그리고 초주검이 되도록 때린 뒤 진흙탕 길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들은 “또 다시 장사 나오면 그땐 죽여버리겠다”며 으름장을 놨다.

간신히 정신을 차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며칠을 앓아 누워야했다. 식구들도 분통을 터뜨리며 함께 울었다. 일주일을 방 안에서만 지냈다. 살아갈 희망도 꺾였고 하나님마저 야속했다.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도 아니요, 저 권속들은 어쩌라고 이런 변을 당해야 하는가’하는 원망이 나왔다.

천막 앞 예배처소에 나가 울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는 음성이 들렸다. 시편 50편 15절 말씀이었다. 나는 이 말씀을 부여잡고 다시 일어났다.

이후 칼빈신학교에 다니는 전도사님 한 분을 알게 됐는데 그로부터 기독문화사라는 출판사에서 신입사원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들었다. 곧장 찾아가 사장님에게 외판사원으로 써달라고 했다. 사장님은 나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형제님, 의욕은 좋지만 그동안 목발 짚고 다니면서 책 파는 사람은 한 명도 본 적이 없습니다.” 사장님은 단번에 거절했다. 나는 임마누엘집의 취지를 설명하고 사원으로 써달라고 다시 통사정을 했다. 결국 각서를 쓰고 사원이 됐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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