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남혁상] 운전석이 중요한 게 아니다 기사의 사진
대한민국 대통령이 다른 나라 정상과 가장 차별화되는 것은 ‘평화적 통일’ 의무를 갖는다는 점이다. 헌법 66조 3항엔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고 규정돼 있고, 대통령 취임선서에도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노력한다’는 대목은 반드시 들어간다. 역대 대통령들은 재임 기간 항상 남북관계 및 한반도 문제에 대한 포괄적인 구상을 밝혀 왔다.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헌법 수호 의지의 발현일 수도 있겠고, 남북관계에서의 커다란 이정표가 가장 큰 업적이 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일 수도 있겠다.

문재인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었다. 문 대통령은 최근 포괄적 한반도 평화 방안을 담은 이른바 ‘베를린 구상’을 천명했다. 베를린 구상의 기본 틀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북한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것이다. 또 평화협정 체결을 통해 한반도에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하겠다는 내용도 담겼다. 문 대통령은 특히 “쉬운 일부터 시작하자”면서 이산가족 상봉, 적대행위 중단 등의 실천방안 등을 제시했다. ‘흡수통일을 추진하지 않고 북한 체제를 보장한다’고 밝힌 것은 3년 전 박근혜 전 대통령의 ‘드레스덴 선언’과는 다른 점이다.

이 제안은 큰 틀에서 보면 17년 전인 2000년 3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과 별반 다르지 않다. 김 전 대통령의 선언은 3개월 뒤 첫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졌고, 이산가족 상봉과 개성공단 가동의 토대가 됐다. 문 대통령은 6·15 남북공동선언과 10·4선언 복귀를 촉구하는 방식으로 김대중·노무현정부의 대북정책 기조를 계승하고 있음을 표현했다. 다만 방법론은 역대 대통령의 기존 구상과는 별다른 차이점이 느껴지지 않는다. 상상력이 발휘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인 듯하다.

단숨에 몰아치듯 정상외교 데뷔전을 치른 문 대통령은 이른바 ‘남북관계의 운전석론’과 ‘한반도 평화통일 환경 조성을 위한 주도적 역할’을 강조했다. 남북관계의 운전대를 우리가 잡는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명제다. 또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남북 대화는 엄밀히 말해 과정이자 방법이다. 남북관계를 우리가 이끈다고 해서 핵 문제나 미사일 문제 등 근본적 문제는 바뀌지 않아왔다. 그동안 남북 대화 전례를 보면 언제나 그랬다. 역대 정부에서 이뤄졌던 남북 대화는 인도적 차원의 이산가족 상봉, 경제·비경제적 협력 역할을 했을 뿐 근원적 문제 해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 역시 마찬가지였다. 북한은 이미 헌법에 핵무력·경제건설 병진노선을 명기했다. 여기에 국제사회, 특히 미국을 향한 협상력을 극대화하는 차원에서 핵·미사일 기술 고도화를 멈추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문 대통령이 취임 후 두 달 만에 평화협정 체결,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을 거론한 것은 성급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북핵·북한 문제에 대한 입체적이고 종합적인 해법 도출이 아닌 새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통과의례처럼 발표하던 구상이라는 느낌도 드는 게 사실이다. 문 대통령은 최근 일련의 정상외교를 통해 우리가 한반도 문제의 주도적 역할을 인정받았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하지만 다른 주변국들도 북한 핵·미사일 같은 얽히고설킨 문제를 우리 정부만의 주도적 역할로 해결이 가능할 것으로 인식하는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북핵·북한 문제는 새 정부가 5년 임기 내내 떠안은 채 풀어내야 할 무거운 숙제다. 조급함이 앞서면 국제사회와의 인식과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 북한이 어떻게 나오는지 충분히 파악하고 이에 대응하는 치밀한 전략을 수립하는 게 정도가 아닐까. 구체적 대북 제안은 그다음에 뒤따르면 어떨까 싶다. 중요한 것은 운전석에 앉는 것 자체가 아니다. 운전대를 잡고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운행하는지가 더욱 중요하다.뒷자리에 앉은 승객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려선 안 되지만, 시행착오를 줄이려면 주위에 길을 물어 가는 요령이 필요하다. 운전하면서도 원활한 소통이 가능하다면 더욱 낫겠다.

남혁상 정치부 차장 hsna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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