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피플] 전북 정읍 영수교회 노인하 목사

성도 12명 시골교회, 대 이어 지키는 총각 목사님

[미션&피플] 전북 정읍 영수교회 노인하 목사 기사의 사진
노인하 전북 정읍 영수교회 목사가 지난 13일 예수님 벽화가 그려진 예배당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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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산 백암산 입암산 방장산으로 이어지는 짙은 녹음(綠陰)은 전북 정읍이 자랑하는 여름 풍경이다. 정읍 입암면의 울창한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개울 옆으로 동화 같은 벽화가 그려진 작은 교회를 만날 수 있다.

“에덴동산에서 예수님이 꽃밭에 물을 주고 아기공룡 둘리가 춤을 추는 모습입니다. 예전에 교회학교 아이들이 그렸던 그림인데 완성하지 못한 채 모두 외지로 떠났어요. 4년째 미완의 작품으로 남겨져 있는데 이제 그마저도 빛이 바랬네요.”

노인하(47) 영수교회 목사는 지난 13일 교회의 벽화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교회가 위치한 연월리는 주민 110여명이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다.

예배당이 처음 세워진 건 36년 전. 성도 서너명이 마을 경로당에 예배처소를 마련해 기도하던 것을 본 노 목사의 아버지 고 노경수 목사가 서울에서의 목회를 내려놓고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45세라는 적잖은 나이, 초등학교에 다니던 3남매의 교육, 부흥에 대한 비전은커녕 사례비도 제대로 받지 못할 목회환경 등 현실적인 문제들이 산적했지만 노경수 목사의 결심은 단단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에서 연월리로 내려온 노인하 목사는 아버지의 목회를 가까이서 지켜보며 목회자의 길을 준비했다. 전북 완주 한일장신대와 경기도 안양 대한신학대학원대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전주와 익산 지역에서 청년사역을 감당하겠다는 목회 청사진을 그렸다. 하지만 신대원 3학년이던 2001년 청천벽력 같은 사고가 터졌다. 연탄불을 때던 사택에서 잠 자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연탄가스에 중독돼 병원으로 실려 간 것이다. 어머니는 사고 후 곧 회복됐지만 아버지의 병세는 악화됐다.

노 목사는 “신대원 졸업 후 아버지를 간병하며 간절히 회복을 기다렸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력이 흐릿해지고 몸을 가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회상했다. 청년사역을 꿈꾸던 젊은 전도사의 일상은 아버지 병간호와 하나밖에 없는 마을 예배당을 지키는 것으로 채워졌다. 결국 노 목사는 결단을 내렸다.

“수없는 고민 끝에 지켜야할 것을 지켜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아버지와 예배당을 함께 보살필 수 있는 길은 영수교회에 남는 것이었습니다.”

50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노 목사는 아직 미혼이다. 다른 곳에서 더 좋은 조건으로 사역하자는 제안도 몇 차례 있었지만 노 목사는 번번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는 “2년 전 아버지가 소천하신 뒤로 저를 향한 어머니의 한숨이 늘었다”며 수줍게 웃었다.

한때 어른보다 초·중·고등학생들이 더 많았던 마을은 일자리를 찾아 타 지역으로 떠나는 주민들이 늘면서 초고령마을이 됐다. 청년시절엔 아버지를 도와 교회학교 사역을 주로 맡았던 노 목사의 역할은 80대를 훌쩍 넘긴 어르신들의 손과 발이 돼주는 것으로 바뀌었다.

3년 전부터는 국민연금공단에서 운영하는 재가복지센터의 센터장도 맡고 있다.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을 병원에 모셔다 드리고 요양보호사를 어르신들의 집으로 보내 가사를 지원하는 일이다.

예배 출석 성도는 12명. 하지만 노 목사에겐 이순신 장군의 배 12척보다 더 든든한 하나님의 군사다. “연월리는 신월마을과 반월마을로 나뉩니다. 신월마을은 매년 초 마을 어귀에 돌을 세워 놓고 제사를 드릴만큼 우상숭배가 여전하지만 영수교회 성도들이 있는 반월마을에선 제사가 사라졌죠. 어렸을 때 ‘우리 인하’라고 불렀던 성도들이 천국 가실 때 병상에서 ‘우리 목사님’하며 손 잡아주실 때의 감동은 말로 다 표현이 안 됩니다. 연월리 전체가 믿음의 마을이 될 때까지 이 예배당에서 성도들과 살아가는 게 저의 목회이자 삶입니다.”

정읍=글·사진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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