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의 로맨스 함께 나눠요” 기사의 사진
전북 익산시 금마면 서동공원에 조성된 서동왕자와 선화공주 조형물이 아름다운 세기의 로맨스를 펼쳐내고 있다. 서동공원은 한반도 형상을 닮은 금마저수지와 용화산을 끼고 있으며, 야외 조각공원과 박물관, 잔디광장, 수변광장, 야외무대, 분수대 등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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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국가 백제의 유적이라면 충남 공주와 부여가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전북 익산에도 뚜렷한 자취가 많다.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백제의 유적 여덟 곳 중 두 곳이 익산 땅에 있다.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가 그 주인공이다. 한강 유역에서 밀려난 백제가 융성을 꿈꿨던 흔적이다. 익산의 유적이 관심을 끌게 된 것은 문화재청의 쌍릉(雙陵) 발굴 결정이다. 1400여년 전 갇힌 고대사의 비밀을 풀기 위해 ‘세기의 로맨스’ 주인공 백제 서동(薯童)왕자(무왕·재위 600∼641년)와 신라 선화공주의 무덤이 100년 만에 다시 열리게 된다. 발굴 조사가 시작되면 한동안 무덤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늦기 전에 서동의 설화, 무왕의 꿈과 영광을 간직한 신비의 땅 익산으로 떠나보자.

1400여년 전 국경을 초월한 매혹적인 로맨스

‘선화공주님은/남몰래 시집가서/서동이를/밤이면 몰래 안고 간다네.’ 신라 제26대 진평왕 때 지었다는 민요 형식의 한국 최초 4구체 향가 ‘서동요’의 내용이다. ‘삼국유사’ 기이(紀異) 제2 무왕(武王)조에 수록돼 있는 서동설화(薯童說話)에 끼어 전한다. 설화에 따르면 이 노래는 어린 시절 마(麻)를 팔아 연명했던 서동이 신라 서울에 들어가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를 얻으려고 지어 불렀다. 시집도 가기 전에 사통(私通)한 공주를 내치라는 신하들의 요구가 격렬해지자 진평왕은 순금 한 말을 노자로 주면서 그녀를 귀양보냈다. 서동이 호위를 자청하며 공주의 마음을 끌어 혼인한다. 선화공주와의 결혼은 서동이 무왕에 오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이 두사람이 잠들어 있는 곳이 익산에 위치한 ‘백제시대’ 고분 쌍릉(사적 제87호)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최근 무덤에 묻힌 사람이 누구냐를 놓고 의견이 분분해지자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 100년 만에 쌍릉 중 대왕묘에 대한 발굴조사가 8월부터 진행된다.

쌍릉은 남북으로 2기의 무덤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북쪽의 대왕묘와 남쪽의 소왕묘로 구성된다. 대왕묘는 지름 30m, 높이 5m 규모이고, 소왕묘는 이보다 조금 작은 지름 24m, 높이 3.5m다. 두 무덤 모두 원형 봉토분으로, 내부는 부여 능산리 고분군과 같은 백제 후기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이다.

유물과 현실의 구조 및 형식이 부여 능산리 고분과 비슷하여 백제 후기의 것이 틀림없으며 대왕묘는 무왕, 소왕묘는 선화공주의 무덤일 것으로 추정돼 왔다. 고려사 금마군조(金馬郡條)와 세종지리지, 동국여지승람에는 쌍릉이 무강왕(武康王)과 비(妃)의 무덤이라고 기록돼 있다.

과거 한 차례 쌍릉에 대한 발굴이 있었다. 1917년 일제강점기 일본인 야쓰이 세이이치(谷井齊一)가 고적조사사업의 일환으로 조사한 뒤 간단한 출장복명서 형식의 보고문과 사진 몇 장을 남겼을 뿐이다.

지난해 1월 국립전주박물관이 대왕묘 목관 내부에서 찾아낸 치아 4점에 대해 “전반적으로 닳은 정도가 비슷하고 중복된 부위가 없어 한 사람의 치아일 가능성이 크고 어금니와 송곳니는 20∼40세 여성의 치아”라고 밝혔다. 또 대왕묘에서 발견된 그릇의 형태를 조사해 백제 토기가 아니라 7세기 전반의 신라 토기와 유사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학계 일각에서는 대왕묘의 피장자는 여성이므로 무왕의 무덤이 아니고 신라 토기가 출토됐다는 사실을 근거로 선화공주가 대왕묘의 주인이라는 견해가 나왔다.

무왕의 꿈이 서린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

왕권에 도전하는 부족세력이 지나치게 성장하면 왕은 수도를 옮김으로써 귀족의 근거지를 없애고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강화를 꿈꾼다. 익산은 무왕의 고향땅이다. 익산 마룡지 인근에 서동의 생가터가 있고 어린 서동이 물을 길어 마셨다는 용샘이 남아 있다. 무왕은 익산으로 수도를 옮겨 그 지역 토착세력의 힘을 얻고 지지기반을 넓히기 위해 집권초기부터 왕궁 등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인 것으로 전해진다.

1400여년 전 백제의 옛 왕궁터에 자리잡은 왕궁리 오층석탑은 당당하면서도 날렵하고, 간결하면서도 섬세함이 균형과 비례를 갖추고 있다. 우아한 자태가 고즈넉한 주변의 풍광과 어우러진다. 주변에 벚꽃이 피는 이른 봄이 가장 황홀하지만 배롱나무 꽃이 피어난 경치도 그에 못지 않다. 텅 빈 공간 뒤쪽의 운치 있는 솔숲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석탑 한 기가 석양 무렵에 뿜어내는 기품만으로도 매혹적이다. 텅 빈 들판에 저 홀로 우뚝 솟은 석탑 한 기가 10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뿜어내는 기운에서 무왕의 간절했던 기원을 본다. 석탑 주변의 궁터는 잘 정비돼 있다. 왕궁의 건물이 들어섰던 자리마다 흙으로 돋워놓았다. 어떤 건물이 들어섰던 자리인지를 설명하는 안내판도 세워놓았다.

왕궁리 유적에서 직선거리로 5㎞쯤 북서쪽에 미륵사지가 있다. 절은 스러지고 탑만 남았다. 이곳에서 볼거리는 모조품처럼 지나치게 말끔한 동탑이 아니라 1997년 이래 지금까지 해체·복원 중인 서탑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석탑으로, 선화공주와의 로맨스로 알려진 백제의 무왕이 아내의 청으로 세운 것이다. 가림막에 가려져 복원중이이서 아직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백제를 일으켜 세우려던 무왕의 꿈이 느껴진다.

미륵사는 무왕과 선화공주가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삼국유사의 기록이 뒷받침해줬다. 하지만 2009년 해체 중이던 미륵사지 석탑 안에서 ‘좌평벼슬의 딸인 왕후가 창건했다’는 요지의 글귀가 발견되면서 혼란이 빚어졌다. 하지만 곧 수습된다. 3개의 구획으로 이뤄진 미륵사지는 시차를 두고 지어졌으며 그 중 하나를 좌평의 딸이 지었다면 다른 둘 중 하나가 선화공주에 의해 지어졌을 것이란 얘기다.

미륵사지 뒤편 미륵산에는 미륵산성이 있다. 조선시대까지 모두 여섯 번 고쳐 쌓았다는 기록 외에는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아무런 단서도 없다. 향토학자들은 백제시대 익산을 방비하기 위해 산성을 쌓은 것으로 보고 있다.

성의 둘레는 1.8㎞ 남짓. 전체 성곽 중 3분 1 정도만 복원됐지만, 구불구불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성곽의 규모가 웅장하다. 동문지에서 올려다보면 성곽이 마치 하늘로 오르는 계단처럼 보인다.

산성 들머리 아래쪽에 구룡마을이 있다. 과거 한강 이남에서 최대로 꼽히던 대나무숲이 마을 한가운데 있다. 여기서 재배되는 대나무로 만든 죽제품은 강경 5일장을 통해 충청도, 경기도까지 공급됐다. ‘생금밭’이라 불리던 대숲은 2005년 냉해를 입어 거의 고사되면서 예전만 못하지만, 자연스럽게 자라는 울창한 대나무에서 청량한 기운이 느껴진다.

여행메모

‘보석박물관’ 제외하고 모든 유적지는 무료

익산시청 주변 숙소 많아… 황등비빔밥 별미


호남고속도로 익산나들목으로 나오면 전북 익산시 왕궁면이다. 왕궁리 오층석탑은 이곳에서 720번 지방도를 타고 금마사거리에서 왕궁면소재지 방면으로 좌회전하면 가깝다. 미륵사지는 익산나들목으로 나와 금마사거리에서 우회전해 722번 지방도로로 바꿔 탄다. 금마면사무소 앞에서 함열·미륵사지 방면으로 좌회전하면 이내 미륵사지다. 미륵산성은 대숲이 있는 구룡마을까지 간 뒤 베데스다기도원 직전 오른쪽으로 거친 비포장도로를 따라가면 된다.

일찌감치 관광지로 자리매김한 웬만한 유적지는 입장료를 받는다. 하지만 익산은 그렇지 않다. 오직 한 곳 ‘보석박물관’을 제외하면 모두 무료다. 정비나 시설이 소홀한 것도 아니다.

익산시청 남쪽 인화사거리 부근에 모텔들이 몰려 있다. 그랜드관광호텔(063-843-7777), 익산비즈니스호텔(063-853-7171), 왕궁온천모텔(063-291-5000) 등이 묵을 만한 숙소다.

익산의 맛으로 꼽히는 음식은 황등면의 황등비빔밥. 콩나물과 시금치 등을 넣고 살짝 비빈 밥 위에 육회를 얹어 낸다. 진미식당(063-856-4422), 시장비빔밥(063-858-6051)이 이름나 있다.

익산=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 그래픽=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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