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케네스 배 <13> 억류 2년 다가오자 낙심과 분노가…

건강 악화로 병원-교화소 오가기 반복… 성경조차 펼 수 없는 영적 침체기 맞아

[역경의 열매] 케네스 배 <13> 억류 2년 다가오자 낙심과 분노가… 기사의 사진
케네스 배 선교사가 2014년 2월 북한 노동교화소에서 언론과 인터뷰하고 있다. 서빙라이프 제공
어머니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는 날 평양의 유명식당 옥류관에서 냉면을 사다 주셨다. 병원 직원과 간수들까지 먹을 수 있도록 넉넉하게 사와 나눠주셨다. 어머니는 북한 관리들에게 화를 내는 대신 친절을 베푸셨다. 어머니의 행동은 내가 나중에 그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디딤돌이 됐다.

어머니와 작별의 포옹을 했다. 마지못해 걸어가시던 어머니가 뒤돌아 나를 바라볼 때 표정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내가 체포돼 기소되고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을 이미 알고 계셨지만, 직접 평양에 와서 보니 가슴이 미어지셨을 것이다. 어머니는 내게 다니엘의 세 친구와 같은 믿음을 품으라 했지만, 어머니에게 그런 믿음이 더 필요해 보였다. “건강하셔야 해요. 어머니.”

병원 치료를 받고 다시 노동교화소에서 계속 노동을 해야 했다. 하수관을 새로 설치할거니 도랑을 파라고 했다. 8시간 동안 곡괭이로 땅을 찍은 뒤 평평한 부분으로 흙을 긁어내려고 애를 썼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에서도 땀이 비오듯 흘렀다. 손은 심하게 저려왔고 허리는 부러질 듯 아팠다. 내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기침이 끊이지 않았다. 일어나면 살이 쑥쑥 빠져 있었다. 치통이 심해 고통스러웠다.

2014년 3월 27일 나는 병원으로 다시 이송됐다. 촬영결과 폐에서 반점이 발견됐다. 노동교화소로 돌아간 지 두 달 반 만에 15㎏이 빠졌다. 병원에 입원해 그저 그곳에 오래 머물기만 바랐다.

2014년 7월 말, 북한은 미국 정부를 더욱 압박하기 위해 또다시 언론과 인터뷰를 시켰다. 해야 할 말을 정해줬다. 난 카메라를 보고 “미국 정부로부터 남겨진 것처럼 느껴집니다”고 말했다.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다시 노동교화소로 이송됐다.

교화소 마당 한쪽 마른 개울바닥에 지름 15㎝ 안팎의 둥근 돌들을 파내 약 140m 떨어진 도로로 옮기는 일을 시켰다. 정오의 온도가 영상 38도에 육박하고 습도까지 엄청 높았다. 오후엔 40도가 넘었다. 하루에 물 7ℓ를 족히 마셨는데 종일 소변도 마렵지 않았다. 땡볕 아래서 나는 종일 찬양을 불렀다. 그래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침에 일하러 나갈 준비할 때도 찬양, 일하면서도 찬양, 저녁에는 거의 매일 발생하는 정전을 틈타 찬양했다. 어둠 속에 홀로 앉아 찬송가를 불렀다.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몸이 피곤하고 삭신이 쑤시는 가운데도 하루를 견디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간수들은 분명 내 찬양을 듣고 있었다. 간수들은 “도대체 비결이 뭐야. 어떻게 이토록 절박하고 절망적인 상황에도 즐겁게 노래를 부를 수 있나. 그 소망은 어디서 오는 거냐”고 물었다.

처음부터 내가 2년 후에 돌아갈 거라는 걸 알았다면 못 버텼을지 모른다. 그런데 ‘다음 주면, 늦어도 다음 달이면…’이라고 생각하면서 달력을 만들어 하루씩 지웠다. “다음 달 달력이 만들어지기 전에 집에 보내주십시오” 하고 매일 기도했다.

몸은 또 쇠약해져 2014년 9월 다시 병원으로 이송됐다. 10월은 극심한 영적 정체기였다. 성경도 좀처럼 펴지 않았다. 북한에서의 2년 동안 성경을 17번이나 통독했지만 그땐 잘 읽지 않았다. 너무 지쳤다. 낙심과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다. 억류된 지 2주년이 코앞에 다가왔다. 앞으로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주님, 도와주십시오. 더는 못 견디겠습니다.”

극심한 실망감에 사로잡혔던 마지막 한 달은 억류됐던 첫 한 달과 함께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정리=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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