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따르는 회중들의 모임, 그곳이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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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버리고 학교로…

1996년 서울 송파구 정신여고 강당에서 주님의교회가 예배를 드릴 당시, 교계는 신선하다는 반응이 많았다. 교회당 건축 대신 학교 시설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이후 2001년 서울 높은뜻숭의교회, 2002년 분당우리교회, 2004년 서울 나들목교회까지 줄줄이 학교로 이전하는 교회들이 등장했다. 지난해 7월 용산구 한남동에서 예배를 드리다 서초구 방배동의 상문고로 이전한 서울드림교회(김여호수아·신도배 목사)까지 이런 현상은 현재진행형이다.

이렇듯 한국교회에서 교회 건물을 소유하는 대신, 학교 등 외부 시설을 임대해 예배드리는 것이 하나의 목회 현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바른교회아카데미 황인성 연구원은 2일 저널 ‘좋은교회’ 8월호에 ‘학교임차형 교회에 대한 연구’ 보고서를 싣고 그 현주소를 짚었다. 지난해 ‘문화역사지리’에 발표된 ‘학교건물 임차형 개신교 교회의 공간분포특성과 운영실태:서울을 중심으로(장은미·정영희)’ 논문과 각 교회별 실태를 참고해 정리한 것이다.

황 연구원은 마포구에서 학교를 빌려 예배드리는 교회의 사례를 들며 “교회 1년 예산의 상당 비용을 절감했고, 모아진 비용으로 사회봉사나 선교 등 대외적 비용으로 사용하는 선순환구조를 만들어냈다”고 적었다. 학교 임차형 교회들은 불필요한 재정 지출을 억제하고 과도한 헌금 강요나 배금주의적 형태를 방지해왔다는 것이다.

그는 또 “기존 건물의 폐쇄성으로 비판받아왔던 전통 교회의 패러다임을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분석했다. 각 교회마다 사용하고 있는 학교와의 협력은 물론 지역 사회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한 사역 모델을 개발해왔다.

반면 교회 건물이 갖는 예전적 의미의 풍성함을 잃어버리고, 교회의 기능 중 ‘코이노니아(교제)’를 충분히 이루기 어려운 점은 한계로 남아있다. 학교 임차형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윤희조(43·여)씨는 “교회가 예배만 드리는 곳이 아니라 교제나 봉사 등의 활동도 필요한데 그런 네트워크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보니 교회에 대한 소속감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결과적으로 대형교회에서 예배만 드리는 경우와 다르지 않다는 비판도 나온다. 실제로 대부분의 학교 임차형 교회들은 출석 성도가 1000명이 넘는 중대형 교회다. 지역도 서울 나들목교회 등 강북 지역에 있는 곳을 제외하면 대부분 서초 송파 강남구에 집중해있다. 이러다보니 교인이 늘면서 학교가 감당하지 못하게 되자 과거와 같은 건물 교회로 회귀하는 경우도 생겼다.

황 연구원은 “그동안 학교 임차형 교회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나 사회방법론적 연구가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며 “향후 인문학자, 신학자들과 함께 연구하는 장기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

■섬기기 위해 거리로…

서울 종로구 종묘광장공원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주 노상(路上)예배를 드리는 기독교인들이 있다. 32도가 넘는 무더운 날씨에도 예배하기 위해 모인 '길위에교회'(박운철 목사) 교인들을 지난달 26일 종묘공원에서 만났다.

이 교회 교인 대다수는 노숙인과 독거노인으로, 2011년부터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일요일 오후2시에 예배를 드린다. 예배가 끝나면 준비한 도시락을 나눠주고 함께 식사한다. 예배장소는 종묘공원 공영주차장 동쪽의 공터. 이곳이 예배장소라는 걸 알 수 있게 하는 건 공터 위쪽 울타리에 걸어놓은 '길위에교회 종로예배처'라고 적힌 낡은 플래카드와 교인들의 뜨거운 찬송소리뿐이다. 이날 모인 교인들은 박수를 치며 "내게 강 같은 평화 넘치네"라는 가사의 찬양을 불렀다.

박 목사는 50대 후반에 목사 안수를 받은 뒤 빈민사역에 뛰어들었다. 젊은 시절엔 해외노동자 중장비기사 국수가게운영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하지만 무엇 하나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그는 "젊은 시절 실패를 통해 다양한 인간 군상을 겪었다. 하나님께서 길위에교회를 위해 예비한 시간"이라고 회상했다.

첫 사역은 2010년 1월 서울 영등포공원에서 시작됐다. 당시 공원에서 교회로부터 상처 입고 신앙을 잃은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설득 끝에 함께 예배를 드렸고, 이 할머니는 놀랍게도 신앙을 회복하겠다고 말했다.

이후 박 목사는 빈민사역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함께 예배드렸던 노숙인은 100여명까지 늘었다. 하지만 곧 회의감이 찾아왔다. 같은 해 8월 공원에서 죽어가는 노숙인을 발견했다. 온몸에 파리가 붙어 있었다. 경찰에 신고했지만 노숙인은 병원 이송을 거부했다. 그는 박 목사에게 물 한 병만 놓고 가달라고 했다. 박 목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결국 1년 만에 영등포공원에서 나왔다. 이듬해 박 목사는 한통의 전화를 받고 다시 빈민사역에 뛰어들었다. 종묘광장공원에서 빈민사역을 하던 양현모 목사가 사역을 이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던 것이다. 낡은 스피커와 앰프, 10여명의 노숙인 외에 물려받을 것은 없었다. 박 목사는 길위에교회라는 이름을 짓고 다시 사역을 나섰다. 길 위에서 복음을 전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의미였다.

예배가 없는 날엔 아내가 운영하는 국수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예배 때는 목사로 변신한다. 박 목사는 "교회 건물을 짓는 건 중요하지 않다"며 "앞으로도 가난한 사람들과 독거노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데 집중할 계획"이라고 했다.

구자창 기자, 임희진 대학생인턴 critic@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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