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박지훈] 머핀과 머랭과의 동거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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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은 사라진 서대문 고가 아래에서 처음 만났다. 날짜는 2010년 5월 25일. 날씨가 어땠는지, 당시 난 어떤 모습이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처음 만난 너를 내 품에 안고 집으로 향하던 그때의 마음은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나의 가슴은 심하게 두근거렸고 너의 심장은 콩콩 뛰었다. 너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울고 또 울었다. 그렇게 7년 전 그 봄날에 나는 한 신혼부부로부터 수컷 샴 고양이 한 마리를 분양받았다. 집에 도착해 우는 고양이를 바닥에 내려놓은 뒤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한참 고민했다. 문득 떠오른 건 당시 읽은 조이스 캐롤 오츠의 장편 ‘멀베이니 가족’이었다.

작가는 미국 중산층 가정인 멀베이니 가족이 상처를 딛고 재결합하기까지의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이야기는 고명딸 매리앤이 성폭행을 당하면서 시작된다. 아버지 마이클은 지역 유지인 가해자 가족을 찾아가 난동을 부리다가 마을에서 고립된다. 매리앤은 스스로를 책망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가족의 일상은 산산조각이 나고, 매리앤은 친척집으로 보내진다. 그는 이때부터 15년 넘게 가족이 없는 곳에서 외따로 살아가게 된다.

사실상 고립무원의 외로움을 견뎌야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겐 둘도 없는 친구가 있었다. 본가를 떠날 때 데리고 나온 고양이 ‘머핀’이었다. 머핀이 없었다면 매리앤은 무참했던 그 고통의 시간을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머핀은 그에게 유일한 버팀목이었으니까. 이 작품이 떠올라 나는 나의 고양이를 머핀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매리앤에게 그랬듯 머핀이 내 삶의 위로와 기쁨이 되길 바랐다. 처음엔 기함할 정도로 빠지는 털 때문에 짜증이 났고 한밤에도 무시로 울어대는 탓에 잠을 설치곤 했지만 고양이가 주는 만족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머핀은 수시로 다가와 얼굴을 비볐다. 깔깔한 혀로 내 손등을 핥았다. 객쩍은 얘기처럼 들리겠지만 종종 난 이런 말을 내뱉곤 했다. 머핀, 내겐 너밖에 없다고.

고양이를 기르는 기쁨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이 담긴 그림책 ‘후와 후와’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문구로 갈음해도 좋을 듯하다. “제법 많은 것을 고양이에게 배웠다. 이를테면 행복이란 따스하고 보드라우며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라든가.”

무탈하게 살던 머핀의 삶이 달라진 건 지난해 4월 16일부터다. 암컷 장모닥스훈트 강아지를 입양하면서 집안의 풍경은 크게 달라졌다. ‘오빠’인 머핀의 이름에서 착안해 작명한 강아지 이름은 ‘머랭’. 바야흐로 머핀과 머랭의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고양이와 강아지의 행태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고양이가 정물(靜物)이라면 강아지는 동물(動物) 그 자체였다. 반가워서 달려들고, 심심해서 물어뜯고, 지루하니 뛰어다녔다. 벽지를 뜯거나 집안 곳곳에 똥오줌을 싸지르는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둘의 언어는 통하지 않았다. 머핀은 머랭을 소 닭 보듯 바라봤다. 그런데 한 달쯤 지났을까. 둘은 부둥켜안고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남들이 보기엔 상대 명줄을 끊어놓겠노라 다짐하며 격투를 벌이는 모양새지만 고양이와 강아지는 서로를 이해하는 듯했다. 개는 고양이밥을, 고양이는 개밥을 훔쳐 먹었다. 둘은 요즘 함께 개집에 들어가 몸을 포개고 잠을 잔다.

고양이와 강아지의 일상을 관찰하고 있노라면 동물 역시 인간처럼 고민하고 희로애락의 감정을 두루 느낀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영장류학자인 프란스 드 발은 저서 ‘동물의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동물의 영특한 두뇌와 세심한 감성을 예찬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인간성을 만물의 척도로 내세우는 대신에, 우리는 다른 종들을 그들이 실제로 어떤 존재인가를 평가할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나는 우리가 아직은 우리의 상상력 밖에 있는 것들을 포함해 마법의 우물을 많이 발견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내겐 프란스 드 발이 말한 ‘마법의 우물’이 머핀과 머랭이다. 고양이처럼 우아하게 살면서 강아지처럼 매사에 기뻐할 수 있다면 좀 더 근사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생각도 한다. 무엇보다 둘은 팍팍한 삶에 적잖은 위로와 기쁨을 선사하고 있다. 의사이자 선교사였던 알버트 슈바이처는 인생의 고통을 피할 수 있는 안식처로 음악과 고양이를 꼽았다. 하지만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이라면 반박하지 않을까. 동물은 그 어떤 음악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세상 그 어느 안식처보다도 아름답고 포근한 존재라고 말이다.

박지훈 문화부 기자 lucidfall@kmib.co.kr, 그래픽=이은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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