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산책] 당신의 바다, 나의 바다 기사의 사진
루노 라고마르시노 ‘바다문법’. 프로젝션 작업 . 국제갤러리
파도가 넘실대는 망망대해다. 대형 화물선이 바다를 유유히 가르며 지나간다. 저 멀리 수평선 너머는 유럽 대륙이요, 바다는 지중해다. 고요하고 평화롭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바다와 하늘 위 저 둥근 점들은 무엇일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인 지중해에 난데없이 흰 구멍을 만든 작가는 루노 라고마르시노(40)이다.

스웨덴 출신의 젊은 아티스트는 지중해를 촬영한 80장의 슬라이드 필름에 구멍을 뚫었다. 첫 번째 슬라이드에는 하나의 구멍을, 두 번째에는 2개의 구멍을, 마지막에는 80개의 구멍을 뚫은 뒤 프로젝션에 걸어, 지중해 이미지가 천천히 사라지도록 했다. 슬라이드 화면이 넘어가면서 푸르른 바다가 하얗게 ‘번 아웃’되는 과정은 생경하지만 자못 의미심장하다. 평온해 보이는 바다에 구멍들이 하나둘 중첩되며 지중해는 긴장의 바다이자, 위기의 바다로 변모한다. 놀라운 반전이다.

21세기 작가는 오늘의 지중해가 품은 속내를 직시하고, 독특하면서도 재기 넘치는 미디어아트를 만들어냈다. 유럽 문명의 발상지요 무역이 성행했던 곳, 지금도 누군가에겐 낭만의 장소이거나 막대한 부를 창출해내는 곳.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난민들에겐 처절한 사투(死鬪)의 해역인 곳. 무수한 결을 지닌 이 현대의 바다를, 비판적 시각으로 예리하게 재해석해낸 라고마르시노의 작업은 서울 삼청로 국제갤러리가 기획한 국내외 작가 그룹전 ‘격자에 갇힌 바다’(20일까지)에서 감상할 수 있다.

이영란(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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