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최상민 <2> 아버지 따라 이민… 말 안 통해 왕따 신세

도미니카공화국서 5년 만에 가족 모여… 공부 흥미 잃고 어머니 식당서 일 도와

[역경의 열매] 최상민 <2> 아버지 따라 이민… 말 안 통해 왕따 신세 기사의 사진
최상민 ESD 사장이 1993년 도미니카공화국 푸카마이마대 병설고 1학년 재학시절 산토도밍고 집 근처에서 사진을 촬영했다.
경기도 남양주시 동화고등학교에 진학해 전교에서 10등 안에 들 정도로 공부에 제법 흥미를 느꼈다. 동화고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92년의 일이다. 도미니카공화국에 있던 아버지로부터 연락이 왔다. “상민아, 도미니카공화국으로 한번 건너오거라.” “예? 저 혼자 어떻게 그 먼 곳을 갑니까.” “마침 아빠 회사 직원이 데려다 준다고 한다. 그분과 함께 미국에서 하룻밤을 묵고 넘어오렴.”

제주도도 가본 경험이 없던 나였다. 도미니카공화국까지 1만3500㎞의 여행은 적잖은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비록 환승을 위해 하루 머물렀지만 미국도 신세계였다. ‘이야. 이런 세상이 다 있구나. 그래, 굳이 좁은 한국땅에 있을 필요는 없다.’ 당시는 공부를 열심히 해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고 멋진 군인이 되는 게 꿈이었다. 하지만 도미니카공화국을 다녀온 뒤 어머니를 설득했다. “엄마, 아빠가 계신 도미니카공화국에 가요.” “됐다. 한국에서도 이렇게 고생하는 데 아무것도 모르는 곳에 가서 뭐하려고.”

93년 아버지는 한국에 남은 어머니에게 나와 남동생을 데리고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넘어오라고 제안하셨다. “여보, 이곳에 와보니 한국식당이 하나도 없더라고. 한국사람이 세운 봉제공장도 있고 한국인이 1000명이나 되지만 식당이 없어서 된장찌개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무척 많다고.” “아이고. 그 못사는 나라에 가서 뭘 하려고요. 고생은 여기서 한 걸로 족해요.” “여긴 우리 가족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의 땅이야. 도미니카공화국은 미국과 무관세 협정을 맺었기 때문에 봉제 산업의 미래가 있어. 한국은 인건비가 안 맞아 이제 사양 산업이 될 거야. 여보, 당신과 떨어져 산 게 벌써 5년째야. 이젠 가족과 함께 있고 싶어.”

아버지의 간곡한 설득에 어머니는 도미니카공화국행을 결정하셨다. 그해 5월22일 미국행 대한항공에 몸을 실었다. 한번 방문해보긴 했지만 미지의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생각에 두려운 마음과 설레는 감정이 교차했다. 마음이 착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88년 이곳에 건너온 아버지는 유대인 회사에서 근무하다가 어찌된 일인지 3개월 만에 일을 그만두게 됐다. 한동안 실업상태에 있던 아버지는 미국 한인사업가 밑에서 일하다가 나중엔 공장장까지 지냈다. 하지만 변변한 기반이 없었기에 삶은 팍팍했다.

어머니가 도미니카공화국에 발을 내딛고 처음 하신 일은 수도 산토도밍고에서 식당을 차린 것이었다. 아리랑이라는 간판을 달고 삼겹살과 불고기, 칼국수, 비빔밥 등을 팔았다. 손님이 한국사람으로 제한된 데다 빚을 얻어 식당을 열었기 때문에 돈을 모으는 건 쉽지 않았다.

나는 집에서 가까운 푸카마이마대 병설고등학교 1학년으로 들어갔다. 한반에 30명이 참가한 수업은 오전 7시부터 오후 2시까지 진행됐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2개월간 말없이 지냈다. 거의 왕따였다.

아리랑 식당은 정오에 손님이 붐볐다. 일손이 모자라 집안일을 돕는다는 핑계로 그냥 집으로 왔다. 실은 학교가 재미없어서였다.

어느 날 교복을 입고 음식을 나르는데 한국 손님 한 분이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아니, 젊은 놈이 공부도 안 하고 도대체 뭐하는 거냐!” “사실은 말이 잘 안 통해서요.” “그럴 거면 미국으로 가서 공부를 해라. 인생 허비하지 말고.”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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