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최상민 <4> 동양인으로 美 주류사회 벽 느껴 대학 자퇴

공인회계사 꿈 포기 불안정한 삶 시작… 도미니카 집 도착하자 어머니가 “철썩”

[역경의 열매] 최상민 <4> 동양인으로 美 주류사회 벽 느껴 대학 자퇴 기사의 사진
1992년 동화고 1학년 수학여행 때 아내 이재숙씨와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함께 한 최상민 ESD 사장.
1996년 9월 나는 뉴욕시립대에 입학하고 아르바이트 자리부터 찾았다. 도미니카공화국에서 고된 식당일을 하시는 부모님 짐을 덜어드리기 위해서라도 일을 해야 했다. 매주 450달러를 받아 저축했다. 98년 6월 한국인 교수님의 제안에 따라 한국행을 결정했다. 그리고 연세대 국제학과에 교환학생으로 갔다. 도미니카공화국으로 이민을 떠나고 미국 유학생활까지 하게 된 내가 6년 만에 한국행을 결정했던 것은 여자친구 때문이기도 했다. 환율이 높다 보니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았던 돈은 한국에선 제법 큰돈이 됐다.

‘여친’을 처음 만난 건 90년이었다. 경기도 남양주 동화중 수요찬양서클에 들어갔는데, 이재숙이라는 같은 학년 여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피아노 치는 모습이 천사 같았다. 위로 오빠가 둘이었던 재숙이는 집안 사랑을 독차지해서 그런지 애교가 넘쳤다. 공부도 잘했다. ‘아, 저런 애가 내 여자친구면 소원이 없겠다.’ 그녀는 나의 로망이었다. 매일 장문의 편지를 썼다. 하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너 왜 자꾸 나 따라다니는데. 편지 그만 보내면 안 될까.” 짝사랑은 정말 고통스러웠다.

‘그래, 재숙이를 꼬시려면 부모님부터 공략해야겠다.’ 마침 재숙이네 집에 놀러갈 기회가 왔다. “안녕하십니까. 재숙이 친구 최상민이라고 합니다.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는 게 제 꿈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오, 네가 상민이구나. 듬직하게 생겼다.” 재숙이 어머니는 나를 좋게 봐주셨다.

재숙이에 대한 사랑은 내가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떠날 때도 한결같았다. “재숙아, 나 도미니카공화국으로 이민가기로 했어.” “그런데?” “응, 네가 많이 그리워질 것 같아서.” “잘 가라.” 재숙이는 여전히 내 마음을 몰라줬다.

도미니카공화국에 도착하고도 국제우편으로 내 마음을 전했다. 6개월 만에 국제전화로 재숙이네 집에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상민이입니다.” “아이구, 이게 누구냐. 상민이 아니니. 재숙아, 상민이한테 전화 왔다.” “어머, 상민이니?” 1만3500㎞의 거리는 분명 우리를 가깝게 했다.

내가 연세대에 왔을 때 재숙이는 춘천교대 졸업반이었다. 매주 청량리에서 춘천행 열차를 타고 재숙이를 만나러 갔다. 미국회계사가 꿈이었던 나는 열차 안에서 한국이 왜 IMF 구제금융을 맞게 됐는지 분석하는 책들을 읽었다. 재숙이는 98년 12월 임용고시에 합격해 강원도 홍천 삼포초등학교로 발령받았다.

1년 만에 다시 뉴욕시립대로 돌아왔다. 백인 학생들이 수업발표를 하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나한테만 발표 기회가 오지 않았다. “너는 영어도 못하는 아시아 사람이잖아.” 다들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 같았지만 웃음 뒤에 보이지 않는 미국 주류사회의 벽이 느껴졌다. 취직을 했던 한국 출신 선배들이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경쟁에서 밀려난다는 이야기도 숱하게 들었다. ‘그래, 미국 사회에선 아무리 공부를 잘하더라도 동양인으로선 한계가 있다. 미래가 정말 뻔하다.’ 미국공인회계사가 되겠다는 꿈도 점점 사라졌다.

99년 10월 학교 행정실에 자퇴서를 제출했다. “미스터 최, 무슨 문제가 있나요?” “아무래도 저는 공부보다는 장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1년만 더 공부하면 졸업할 수 있는데 꼭 자퇴를 해야 하겠습니까.” “예.”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또다시 불안정한 삶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대학 중퇴자. 아리랑 식당에 들어서니 어머니가 성큼 다가오셨다. 손바닥이 얼굴로 날아왔다. “철썩.”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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