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이야기] 그 버스에 ‘나’는 없었다… 20대 청년 살린 승객들 기사의 사진
지난 9일 밤 경남 창원의 한 시내버스에서 발작을 일으켜 의식을 잃은 남성을 승객들이 바닥에 눕히고 있다. 버스기사는 운행노선을 벗어나 곧장 병원으로 달렸고 그 사이 승객들은 흉부압박 등 응급처치를 했다. 환자는 무사히 퇴원했다. CCTV 캡처
시내버스는 정해진 노선을 벗어나 엉뚱한 길로 달렸다. 늦은 밤 1분이라도 빨리 집에 가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지만 20여명의 승객들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환자와 버스 앞쪽을 번갈아 보기만 했다. 1초라도 빨리 병원에 도착하기를 기도하는 듯했다. 이들의 바람이 통했던 것일까. 버스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던 청년은 무사히 퇴원할 수 있었다.

지난 9일 막차시간을 얼마 남기지 않은 밤 10시35분쯤. 경남 창원시에서 110번 시내버스를 운전하는 임채규(43)씨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승객 20여명을 태우고 운행 중이었다. 마산회원구 보문주유소를 지나 창원교도소 정거장으로 향하던 중 갑자기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백미러엔 20대 남자 승객이 발작을 일으켜 가방을 떨어뜨린 채 의자 뒤로 고개를 젖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임씨는 버스를 정거장 인근에 세운 뒤 다른 승객들과 함께 상태를 확인했다. 청년은 의식을 잃은 듯 보였으나 다행히 호흡에는 이상이 없었고, 임씨는 119에 신고한 뒤 구급대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청년이 몸을 뒤틀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이자 몇몇 승객이 “119가 언제 올지 모르니 차라리 버스로 병원으로 옮기자”고 말했다. 임씨는 잠깐 망설였다. 환자 상태도 잘 모르는데 자칫 병원으로 가다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위급한 상황의 환자를 두고 기다리는 것보다는 가장 가까운 병원까지 달려가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는 판단이 섰다. 임씨는 곧 승객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버스의 병원행에 불만을 표시하는 승객은 없었다.

110번은 창원시 성산구 안민동 청솔아파트에서 마산회원구 중리 인계초등학교까지 가는 버스로 종점까지는 20여개 정류장이 남아 있었으나 임씨는 10여개 정류장을 지나쳐 원래 노선과 다른 방향으로 달렸다. 병원으로 가는 동안 승객 2∼3명은 바닥에 눕힌 환자에게 심폐소생술을 시도했고 10분 남짓 후 버스는 병원에 도착했다. 119 구급차가 호출 현장에 도착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구급차를 기다렸다면 환자가 병원까지 가는데 시간이 배는 더 걸렸을 텐데 이를 절반으로 단축한 셈이다.

승객들의 응급처치 덕분에 20대 환자는 버스 안에서 의식을 어느 정도 되찾았고, 병원에서 치료받고 퇴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병원 도착 직후 임씨는 정거장을 놓친 승객들에게 모두 데려다주겠다고 제안했으나 상당수 승객들은 “환승해서 가면 되니 신경쓰지 말라”며 병원에서 흩어졌다. 가는 방향이 맞는 일부 승객만 태운 채 임씨는 종점인 인계초등학교에 도착한 뒤 퇴근했다.

임씨는 “경황이 없어 승객들에게 제대로 감사 인사를 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린다”며 “내가 한 것은 운전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승객들이 모두 좋은 사람이어서 청년을 구할 수 있었다”며 모든 공을 승객들에게 돌렸다.

창원=이영재 기자 yj3119@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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