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김영석] 탈원전 플랜B는 필요하다 기사의 사진
문재인 대통령은 17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지금 가동되는 원전의 수명이 완료되는 대로 하나씩 문을 닫겠다”고 했다. 이럴 경우 가장 먼저 폐쇄되는 원전은 경북 경주 월성 1호기다. 설계 수명 30년인 월성 1호기는 1983년 4월 가동을 시작해 한 차례 10년 수명이 연장됐다. 오는 2022년 11월까지 가동 예정이다. 설계 수명 40년인 부산 기장의 고리 2호기와 고리 3호기는 각각 2023년, 2024년 가동 중단된다. 고리 4호기와 전남 영광의 한빛 1호기는 2025년, 월성 2호기와 한빛 2호기는 2026년 멈춘다. 2027년 경북 울진의 한울 1호기와 월성 3호기, 2028년 한울 2호기, 2029년 월성 4호기 등 원전 11기가 2030년 이전에 수명을 다한다. 문재인정부 임기는 2022년 5월까지다. 문재인정부 임기 내 폐쇄되는 노후 원전은 하나도 없다.

한국이 독자 개발한 3세대 원자로 ‘APR 1400’이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의 6단계 심사 중 3단계를 통과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내년 9월이면 인증 작업이 마무리될 것이라고 한다. NRC 심사는 세계에서 가장 까다롭다. NRC 심사를 통과한 3세대 원자로는 미국 웨스팅하우스의 AP 1000 정도다. 프랑스의 아레바는 심사를 중단했고,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은 10년째 2단계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APR 1400은 규모 7.0의 지진에도 안전하도록 설계됐다. 냉각 장치가 파손돼도 노심을 자동 냉각시키는 설비와 전원 없이도 수소를 제거하는 기술을 갖췄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과 같은 사고를 원천봉쇄할 수 있다는 의미다. 지난해부터 상업 운전을 시작한 신고리 3호기와 아랍에미리트 수출 원전 모델이다. 신고리 5,6호기에도 들어갈 예정이었다. 안전성이 보장된 원전 건설은 중단하고, 노후 원전은 가동되는 ‘안전의 역설’이 현실화될 수 있는 상황이다.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신고리 5,6호기 원전 건설 중단 찬반은 팽팽하다. 반면 원자력 발전 이용에 대해선 찬성 의견이 반대보다 2배 가까이 많이 나온다. 사람들은 정치화된 사안에 의견을 바꾸는 경우가 많지 않아 공론화위원회도 권고안에 일방의 의견을 담아내기 쉽지 않다. 여기에다 대규모 정전 사태가 발생한 대만의 사례는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준다. 수도 타이베이를 비롯해 전체 가정의 3분의 2가 어둠에 갇혔다. 총통까지 나서 사과했다. 문재인정부가 대만을 모델삼아 탈원전을 추진하기에 남의 일 같지 않다. 대만처럼 치밀한 준비 없이 탈원전을 밀어붙이면 2011년 정전 대란과 2014년 블랙아웃 위기가 되풀이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제3의 대안을 심각히 고민해 볼 시점이다. 안전성이 담보된 신고리 5,6호기 건설은 지속하되 준공 시기에 맞춰 노후 원전을 앞당겨 폐쇄하는 방식이다. 설계 수명과 관계없이 안전에 문제가 발생한 노후 원전을 우선 폐쇄하는 것도 한 방편이다. 동시에 백업 전원이나 신재생 에너지 기술 개발 등 탈원전을 위한 기초 체력부터 키워나가면 어떨까. 이른바 탈원전 플랜B다. 감(減)원전 절충안이다. 탈원전 원칙은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전체적인 전력 수급도 문제가 없다. 청와대는 여권 인사의 사견이라며 부인했지만, 고려해볼 가치가 충분하다.

에너지 정책은 한 번 결정되면 모든 국민에게 동일한 영향을 미친다. 개인이 선호하는 방식을 택할 수 없다. 5년 임기 대통령이 일방 추진하는 건 비합리적이다. 다수의 의견을 모아야 한다. 정권교체와 관계없이 지속성을 유지하려면 더욱 그러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국민투표다. 헌법 제72조에는 외교, 국방, 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 정책을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고 규정돼 있다. 대만 사태에서 보듯 탈원전 정책은 국민투표를 할 만한 중대 사안이다. 적절한 시점이 있다. 문 대통령은 내년 6월 지방선거 때 개헌을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하겠다고 했다. 이때 탈원전 정책도 국민투표에 부치면 된다. 사람의 동맥과 같은 에너지 정책을 놓고 도박을 하기엔 너무나 위험하다.

김영석 논설위원 ys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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