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모든 여성에게 일어날 수 있는 비극 보고서 기사의 사진
한 소녀의 긴 머리칼이 석양에 빛나고 있다. ‘레티시아-인간의 종말’은 남성의 폭력에 희생된 소녀 레티시아의 삶을 기리며 그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쓰여진 기록이다.픽사베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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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살해 사건은 전 세계 도처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지만 웬만해선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한다. 지난해 5월 서울 강남역에서 일어났던 여성 살인 사건이 주목받은 것은 예외적이었다. 억눌려왔던 여성들이 목소리를 냈고 그 목소리가 증폭되면서 우리 사회에 ‘여성혐오’에 대한 의식을 환기시켰다. 2011년 프랑스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일명 ‘레티시아 사건’. 무고한 여성이 한 남성에게 살해당했고 익명의 다수가 그 사건을 슬퍼하며 모였다는 점에서 ‘강남역 사건’과 비슷하다.

“내가 아는 모든 범죄 이야기는 희생자를 대가로 하여 살인범에게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나는 반대로 죽음으로부터 모든 남녀, 즉 인간을 해방시키고 싶다. …내 책에는 단 한 명의 주인공, 레티시아가 있을 것이다.” 역사학자이며 작가이자 세 딸의 아버지인 저자 이반 자블론카가 쓴 서문이다.

‘레티시아-인간의 종말’은 레티시아 사건이 일어나고 종결되기까지 연루된 이들의 생애를 연대기적으로 추적하는 한편, 소녀의 죽음이 수사를 통해 규명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그럼으로써 남성의 폭력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여성의 생애를 드러내고 여성의 희생이 사회적으로 애도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2011년 1월 프랑스 낭트 인근에서 18세 소녀 레티시아 페레가 실종된다. 용의자 토니 멜롱이 헌병대에 체포되지만 시신을 찾지 못한다. 사람들은 레티시아가 납치된 마지막 여정을 따라 ‘백색 행진’을 하고 한 달여 뒤 토막 난 사체가 발견된다. 이 사건은 전국 규모 시위로 번진다.

“레티시아는 살아가며 최소한 세 가지 유형의 강간을 겪었다.” 어린 시절 친부는 별거한 어머니를 찾아와 폭력적인 성관계를 가졌고, 위탁가정의 양부는 쌍둥이 언니를 강간했고, 그녀를 살해한 멜롱은 두려움에 떠는 그녀에게 성행위를 강요했다. 하지만 자블론카는 그녀가 ‘자유로운 여성’으로 죽었다는 것을 밝혀낸다. 레티시아는 멜롱의 구타와 강요된 성관계에 “노(No)”라고 했고 그것이 그녀의 생명을 앗아갔기 때문이다.

“그녀의 내면에 굴복해야할 여성이, 깔아뭉개고 파괴되어야할 여성이 있다는 점에서 레티시아는 ‘여성으로서’ 죽임을 당한 것이다. 처벌이자 동시에 복수이기도 한 레티시아 살해는 여성혐오 범죄이다.” 자블론카가 다다른 도저한 결론이다.

저자의 어조는 신중하고 묘사는 치밀하고 문체는 아름답다. 책의 마지막 문장은 레티시아가 쓴 시구 “그렇다, 그렇게 삶은 축제다”로 끝난다. 치열한 자유 의식과 정의감을 소유한 작가가 살인사건 기록을 문학으로 승화하고 역사로 승격시킨다. 이 책은 논픽션으로는 드물게 지난해 프랑스 메디치상과 르몽드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이야기는 역사가로서의 나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나, 시민으로서의 나에게 감동을 준다.” 작가가 메디치상 수상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쌍둥이 자매가 당한 학대와 폭력을 읽어 내려가는 게 고통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은 우리가 ‘강남역 사건’ 이후 더 집요하게 추적하고 애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세밀하게 보여준다. 다시 일어날지 모르는 또 다른 강남역 살인 사건에 대비하기 위해 심호흡하고 숙고하며 읽을 역작이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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