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고승욱] 계란 파동, 유체이탈 화법은 없었는가 기사의 사진
박근혜정부가 국민과 소통하지 못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유체이탈 화법’이다. 국어사전에는 나오지 않는 인터넷 유행어다. 몸을 벗어난 영혼이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을 바라보듯 대통령을 비롯한 국정 책임자들이 자신을 쏙 빼고 정부의 잘못을 비판하는 것을 빗대며 비꼬는 말이다.

메르스 사태 직후 박 전 대통령이 “여객선이 침몰해도 우왕좌왕, 치명적 전염병이 돌아도 우왕좌왕, 지금 이 나라를 무정부상태로 만든 것은 반정부세력이 아니라 정부 자신”이라고 말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당시 인터넷에서는 “가장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할 대통령이 자신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처럼 정부와 공직자들을 질타했다. 전형적인 유체이탈 화법”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굳이 지난 정권의 불편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최근 살충제 계란 사태가 터진 뒤 청와대와 국무총리실의 초기 대응이 좀처럼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살충제 계란이 대부분 조간신문의 1면 머리기사로 나온 지난 16일 청와대는 서면브리핑을 통해 ‘문재인 대통령이 이낙연 국무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총리가 범정부적으로 종합관리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해달라고 지시했다’고 발표했다. 이 총리는 곧바로 국무회의에서 “농림축산식품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처가 국민들께 가장 알기 쉬운 방법으로 가장 정확하고, 가장 정직하게 설명드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늘 했던 대로 행정처리가 있었고, 발표가 이뤄졌다.

그런데 주무부처 책임자인 김영록 농식품부 장관과 류영진 식약처장이 서로 엇박자를 내고 허둥거리면서 일이 꼬였다. 화가 난 사람들이 ‘대통령 지시를 장관에게 전달하는 게 책임 총리의 역할인가’ ‘대통령이 직접 장관들을 지휘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 아닌가’ ‘대통령은 총리에게, 총리는 장관에게, 장관은 직원들에게 책임을 넘기는가’라는 비난을 쏟아냈다. 정부를 믿지 못하겠다는 불만이 높아졌고, 사태는 점점 악화됐다. 결국 문 대통령은 5일 뒤 국무회의에서 “국민께 불안과 염려를 끼쳐드린 데 대해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사과했다. 이 총리는 국회와 현장을 뛰어다니며 진땀을 흘렸다. 대통령이 늦게라도 책임지는 자세를 보이지 않았더라면 살충제 계란 초기 대응은 문재인정부에서 유체이탈 화법이 구사된 첫 사례로 기록될 뻔했다.

지금 청와대와 총리실에서는 살충제 계란 사태에 제대로 대처했는지를 평가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일단 급한 불은 껐다는 판단에서다. 24일 문 대통령이 주재하는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안건으로 올랐다. 이 총리는 같은 시간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에서 다뤘다. 정부는 앞으로 계란 생산방식과 정부인증제도 보완 같은 장기대책에 집중할 것이다. 잘못된 시스템을 개선하지 않고는 반복될 수밖에 없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복기 과정에서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대통령부터 일선 책임자까지 유체이탈 화법은 없었는지 점검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게 나라냐”라는 플래카드가 광화문 곳곳에 등장했던 게 불과 몇 개월 전이다. “이것이 나라다”라는 감동은 과거 잘못을 바로잡겠다는 약속과 그렇게 할 것 같은 겸손한 자세에서 비롯됐다. 아직은 구호일 뿐 실제로 눈으로 본 것이 아니어서 언제 다시 “나라꼴이…”로 바뀔지 모른다. 서유럽 국가조차 피하지 못했던 살충제 계란 같은 돌발 사고를 압축적 경제성장 과정에서 쌓인 불합리한 시스템이 도처에 남아있는 우리가 완벽하게 예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자연재해나 각종 사고도 있다.

문제는 믿음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정부는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으로 확신하는 신뢰가 중요하다. ‘인력과 예산이 부족하다’ ‘우리 부처 소관 업무가 아니다’라는 대답은 지긋지긋하다. 인력과 예산을 확보하는 것도, 역할을 분담하고 업무를 조율하는 것도 다 정부의 일이다.

고승욱 논설위원 swk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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