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이지현] 중력과 은총 기사의 사진
우주엔 서로를 붙잡아주는 ‘중력’이 존재한다. 중력은 인간, 동식물 모두에게 적용되며 지구와 우주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힘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중력의 힘에서 벗어나서 살 수 없다. 그러나 잡아당기는 중력의 힘 속에서도 예외는 있다. 그것은 작은 씨앗이 햇빛을 받아 싹을 틔우고 광합성을 하며 하늘 높이 자라 열매를 맺는 생명력이다. 이는 중력의 힘보다 크다.

프랑스 사상가 시몬느 베이유는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영혼의 움직임을 ‘은총’이라고 표현했다. 현실적인 구속력을 가지고 있는 중력에도 예외적인 은총의 힘이 작용하면 우리는 고난 속에서 하늘을 볼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저서 ‘중력과 은총’은 유대인 출신의 시몬느 베이유가 나치 치하에서 질병에 시달리며 고통받던 1940년에서 1942년 사이 주로 써내려간 단상들이다. 극한 상황에서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인간에 대한 이해가 신비로운 신앙 체험과 통합돼 있다.

시몬느 베이유는 세상 모든 것이 중력이라는 필연성의 영향 아래 놓여 있으며, 초자연의 빛인 은총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은총’이란 초자연의 빛이다. 중력에서 벗어날 유일한 가능성은 중력 법칙으로 하강하는 존재에게 은총의 빛이 깃들어 상승할 수 있을 ‘빈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에 있다고 봤다.

예를 들어 중력을 역사적 사건이나 개인적인 고난 등 우리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비극적인 힘에 비유해 보자.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현장 취재를 통해 광주의 참상을 해외에 알린 독일인 외신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와 광주시민들은 비극적인 중력에 저항해 은총의 빛이 깃들게 한 것이다.

은총의 빛이 우리 삶에 깃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인간 내부엔 눈에 보이지 않는 원죄(原罪)가 있다. 원죄 역시 우리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중력과 같은 것이다. 미우라 아야코는 소설 ‘빙점’에서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지만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깨닫고 회개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으며, 최후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면 어떤 고난도 이길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소설 속 주인공 요코는 유괴 살인범의 딸이란 ‘주홍글씨’를 안고 살아야 하는 원죄의식에 괴로워한다. 하지만 요코의 잘못이 아닌 대물림, 원죄이다. 요코가 살인범의 딸이 아니란 게 밝혀지면서 소설은 인간 마음을 얼어붙게 만드는 ‘중력의 힘’도 회개, 희망, 용서란 은총의 힘을 입으면 치유되고 회복된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시몬느 베이유가 말한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영혼의 움직임, 은총의 힘이다.

우리는 정치 경제 문명이란 중력 속에 살고 있다. 이 속에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빛이 존재한다. 은총은 햇빛과 같다. 하나님의 은총은 햇빛처럼 선한 사람에게도 악한 사람에게도, 옥토나 자갈밭에도 똑같이 비친다. 하지만 옥토는 알찬 열매를 맺게 되고, 자갈밭은 결실을 내지 못한다.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포도나무가 되고, 마음 밭을 옥토로 일궈야 한다.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중력에 힘겨울 때, 미래가 전혀 보이지 않을 때 은총을 간구해야 한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중력이지만 하나님의 은총은 햇빛처럼 우리에게 생명을 부어주신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면 가을과 겨울이 오는 자연의 법칙처럼 우리 삶엔 운명이라고 여겨지는 일들이 수없이 생길 것이다. 이때 세상에 존재하는 두 가지 힘, 중력과 은총을 기억하자. 중력을 거스르며 말없이 벽을 오르는 담쟁이와 햇빛을 받아 하늘 높이 자라는 나무들처럼 중력에서도 예외적인 은총의 힘이 작용하면 우리는 고난 속에서 하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걱정과 근심이 나를 아무리 강하게 잡아당겨도 최후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면 은총을 만날 수 있다.

다만 고난을 당할 때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고난 중에서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그 희망이 은총이 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이지현 종교기획부 선임기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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