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찬 심진경의 명작은 시대다] 저들의 고통이 내 몸 안에 있다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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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당연하지만 쉽게 간과하는 사실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먹는' 행위는 반드시 '먹히는' 대상의 죽음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생명이란 다른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서만 유지된다는 점에서 잔인하고 사악한 것이다. 특히 인간은 생태계 피라미드의 최상위 존재로 지구상의 거의 모든 생명체를 먹어치울 수 있는 강력한 포식자다. 그리고 이 최상위 포식자를 떠받치는 피라미드의 최하층에는 자동화된 공장식 농장에서 대량생산된 소 닭 돼지 등이 있다. 인간을 위해 먹거리로 태어나 먹거리로 죽는 존재들. 함부로 다뤄지는 존재들. 그(것)들도 살아 있는 생명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리고 인간이 생존을 위해 다른 생명을 사육하고 죽이는 폭력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이 한강의 '채식주의자' 중심에 있는 물음이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이라는 서로 느슨하게 연결된 세 편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연작소설이다. 이 연작은 제목 그대로 육식을 거부하고 채식을 선택한 한 여성의 기이한 변신 과정을 따라간다. 세 편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인물은 바로 주인공 ‘영혜’다. 각각의 소설은 서로 다른 세 명의 서술자 즉 영혜의 남편, 형부, 언니(인혜)의 시점으로 영혜의 급격한 변신 과정을 포착한다.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여자”였던 영혜가 어떻게 채식주의자에서 근친상간의 금기를 깬 패륜아로, 그러다가 급기야 스스로를 ‘나무’라고 상상하는 정신병자로 변화하는지가 그려진다.

영혜는 소설의 주인공이면서도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변화를 정작 자기 입으로는 말하지 못한다. 그녀에겐 말하는 입이 박탈되어 있다. 그녀는 오직 다른 사람들의 눈을 통해 보여지고 이야기되는 존재로만 그려진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채식주의자-식물적 육체-나무’로 이어지는 영혜의 탈인간 프로젝트는 그 자체로 하나의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이자 암호가 된다. 영혜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채식주의자’에서 가장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장면을 보자.

아버지는 녀석을 나무에 매달아 불에 그슬리면서 두들겨 패지 않을 거라고 했어. 달리다 죽은 개가 더 부드럽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대. 오토바이의 시동이 걸리고, 아버지는 달리기 시작해. 개도 함께 달려. 동네를 두 바퀴, 세 바퀴, 같은 길로 돌아. 나는 꼼짝 않고 문간에 서서 점점 지쳐가는, 헐떡이며 눈을 희번덕이는 흰둥이를 보고 있어. 번쩍이는 녀석의 눈과 마주칠 때마다 난 더욱 눈을 부릅떠. 나쁜 놈의 개, 나를 물어? (중략) 개에 물린 상처가 나으려면 먹어야 한다는 말에 나도 한입을 떠넣었지. 아니, 사실은 밥을 말아 한 그릇을 다 먹었어. 들깨냄새가 다 덮지 못한 누린내가 코를 찔렀어. 국밥 위로 어른거리던 눈, 녀석이 달리며, 거품 섞인 피를 토하며 나를 보던 두 눈을 기억해. 아무렇지도 않더군.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어.

부드러운 육질을 위해 개를 오토바이 뒤에 매달아 개가 죽을 때까지 동네를 달리고 그렇게 해서 죽은 개를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잔치”를 벌이듯이 먹어치운다. 이 장면은 먹는 일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죽어가는 개의 고통스러운 얼굴에 주목하지 않는다. 오직 영혜만이 “녀석의 덜렁거리는 네 다리, 눈꺼풀이 열린, 핏물이 고인 눈을” 뚫어지게 응시한다. 그녀는 말한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어.” 아무렇지 않았음을 한사코 강조하는 영혜의 이 말은 죽어가는 개의 고통스러운 얼굴이 영혜에겐 결코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았음을 역설적으로 항변한다. 문제는 이 세계가 이미 이런 폭력적인 질서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점이다. 고도로 문명화된 질서를 떠받치는 것은 먹지 않으면 먹힌다는 야만적인 생존의 논리였던 것이다. 그래서 불면과 거식으로 바싹 마른 영혜를 향해 그녀의 어머니는 이렇게 외쳤는지도 모른다. “네 꼴을 봐라, 지금. 네가 고기를 안 먹으면, 세상 사람들이 널 죄다 잡아먹는 거다.”

따라서 이 소설의 핵심 키워드는 채식 그 자체가 아니라 채식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억압하는 ‘상식’과 ‘원칙’이라는 이름의 폭력이다. 특히 ‘채식주의자’에서 이러한 폭력은 가부장제적 가족주의와 결합하면서 더 첨예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폭력적인 아버지, 그녀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남편, 그리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딸을 기만하는 어머니. 이들은 육식을 거부하는 건 비정상이라고 생각한다. 육식(엄밀히 말하면 잡식)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원만하다는 증거”이자 화목한 가족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요구되는 최소한의 규범과 질서다. ‘채식주의자’에서 채식의 의미는 따라서 단순히 육식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육식으로 대변되는 인간중심적, 남성중심적 질서에 대한 거부다. 그것은 또한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고 끊임없이 ‘정상적’이기를 강요하는, ‘원칙’과 ‘상식’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한국사회의 저 모든 일상의 폭력에 대한 강렬한 비판이다.

이 소설에서 채식은 또한 자기 바깥의 존재들과의 관계 맺기에 대한 고민과도 이어진다.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저 생명들을 어찌할 것인가? 이는 나의 생명을 위해 죽어가는 타자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나 공감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연민이나 공감은 자기의 입장에서 타자의 고통과 일정한 거리를 취해야만 가능한 자기중심적인 정서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타자의 고통에 가 닿을 수 있는가? 나아가 우리는 어떻게 우리 바깥의 존재와 교감할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타자적 존재가 됨으로써만 가능한, 불가능한 미션이 아닐까?

소설은 이런 물음을 안고 영혜의 ‘식물-되기’의 상상력을 향해 뻗어간다. 식물이 된다는 건 ‘자기’를 버리고 자기 스스로 아예 타자가 되어버림을 의미한다. 한강을 비롯한 많은 작가들에게 식물 되기의 상상력은 동물성으로 대변되는 인간중심적 가치에 대한 문명론적 비판을 위해 자주 동원됐다. 특히 한강은 전작인 ‘내 여자의 열매’에서 답답한 도시의 일상적 삶에 속박당한 한 여성의 절망과 좌절을 식물 되기라는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인 몽상”의 방식으로 재현했다. 소설 속 ‘그녀’는 완전하게 식물로 변신하고 그녀의 남편은 식물이 된 그녀를 화분에 심는다. 그러나 ‘채식주의자’에서 이러한 행복한 변신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영혜는 육식을 강요하는 가족 앞에서 괴성을 지르며 칼로 자기 손목을 긋는다. 그녀는 점점 이해할 수 없는 존재, 즉 말 그대로 타자가 된다.

연작의 두 번째 소설인 ‘몽고반점’에서 형부인 ‘그’의 예술적·성적 충동을 불러일으킨 영혜의 몽고반점은 그런 점에서 타자적 존재로서의 표식(혹은 낙인)이다. 영혜의 몸에 뚜렷하게 남아 있는 몽고반점은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으로 그려진다. 이는 그녀가 인간 이전으로 퇴화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점차 현실 사회에서 이해받기 어려운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로 변모하기 시작했음을 암시한다. 예술적 퍼포먼스를 표방한 영혜와 형부(‘그’)의 정사는 결국 영혜가 규범적 도덕적 가치체계로부터 완전히 일탈하게 되었음을 분명히 한다.

그리하여 연작의 세 번째 소설 ‘나무 불꽃’에 이르러 영혜는 스스로를 식물(나무)이라고 착각하는 정신병자가 되어 정신병원에 감금된다. 이제 영혜는 “경계 저편으로 넘어간” 영원한 타자가 된다. 타자의 고통에 괴로워하다가 급기야 그 고통에 전이되어 존재변이에 이른 영혜는 결국 인간계에서 완전히 추방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영혜(와 같은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가? 혹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어쩌면 그럴는지도 모르겠다. ‘나무 불꽃’에서 영혜의 언니인 인혜는 나무가 되기 위해 모든 음식을 거부하고 죽음을 향해 달음박질치는 동생의 고통 앞에서 캄캄한 절망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가족이 “이상하고 무서운” 미친 영혜의 곁을 떠날 때 인혜만은 끝까지 옆에 남아 그녀를 돌본다. 영혜가 자기 남편과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상식과 이해의 용량을 뛰어넘는” ‘짓’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인혜는 결코 “영혜를 버릴 수 없었다.” 오히려 인혜는 수수께끼 같은 영혜의 마음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언어화되지 못한 그녀의 외침에 귀 기울이려고 노력한다. ‘나무 불꽃’에서 영혜는 앞선 두 작품에서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정신병자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불가해한 내면이 좀 더 설득력 있게 제시되는 듯한 인상을 주는 이유는 바로 정상과 비정상,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갈등하는 인혜 때문이다.

봄날 오후의 국철 승강장에 서서 죽음이 몇 달 뒤로 다가와 있다고 느꼈을 때, 몸에서 끝없이 새어나오는 선혈이 그것을 증거한다고 믿었을 때 그녀는 이미 깨달았었다. 자신이 오래전부터 죽어 있었다는 것을. 그녀의 고단한 삶은 연극이나 유령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선 죽음의 얼굴은 마치 오래전에 잃었다가 돌아온 혈육처럼 낯익었다.

인혜 또한 아버지의 폭력에 길들여져 왔으며, 그런 관성으로 삶의 고통과 치욕마저 지우며 견뎌왔던 것이다. 그녀는 분명 “언제까지나” 성실한 생활인으로 살아갈 것이지만, 때론 자기 “몸뚱이보다 크게 벌어진 상처”의 “구멍 속으로 온몸이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 같”은 강렬한 죽음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우리는 고통을 통해서만 타자의 고통에 일시적이나마 공명한다. 그럴 때라야 우리는 우리 바깥의 존재들과 불가능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연대의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그 불가능한 가능성을 조용히 묻고 있다.

<심진경 문학평론가>

■한강, 차원 높은 상징성·뛰어난 작법… 작년 '맨부커상' 수상

한강(47·사진)은 1993년 계간 '문학과 사회'에 시 '서울의 겨울'이,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95년 첫 소설집 '여수의 사랑'에서부터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2014)에 이르기까지 한강 소설의 주된 관심사는 세계의 폭력 속에서 힘겹게 개별적 삶을 지탱하고자 하는 연약한 존재들의 비극적 운명에 관한 것이었다. 초기 단편소설에서는 주로 '관계 맺기'의 어려움 때문에 스스로를 고립시킨 청춘들의 우울한 내면을 뚜렷한 색채 이미지와 시적인 문체로 다뤘다.

그는 '몽고반점'으로 2005년 심사위원 만장일치 속에 '이상문학상' 수상자가 됐다. 심사위원장인 이어령 문학평론가는 "기이한 소재와 특이한 인물 설정, 그리고 난(亂)한 이야기의 전개가 어색할 수도 있었지만, 차원 높은 상징성과 뛰어난 작법으로 또 다른 소설 읽기의 재미를 보여주고 있다"고 평했다.

한강은 이 작품이 포함된 연작소설집 '채식주의자'(2007)로 지난해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와 함께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했다. '채식주의자'는 일상적으로는 감지하기 어려운 이 세계의 폭력성을 예민한 정서와 민감한 촉수로 섬세하게 폭로함으로써 개별 존재가 자기 바깥의 타자와 어떻게 윤리적으로 관계 맺으면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한다. 이러한 고민은 80년 5월 광주를 고통의 당사자의 목소리를 빌려 증언한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2014), 인간의 고통과 마주한 글쓰기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는 단편소설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2016)으로 이어진다.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는 전 정권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다시 한 번 화제가 되었다.

작가는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으로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외에 작품집으로는 '내 여자의 열매'(2000) '노랑무늬영원'(2012) '흰'(2016), 장편소설에는 '그대의 차가운 손'(2002) '검은 사슴'(2005) '바람이 분다 가라'(2010) '희랍어 시간'(2011) 등이 있다. 시집에는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2014)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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