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내렴의 성화묵상] 종의 모습으로 섬기는 위대한 이

베드로의 발을 씻기는 예수(1852∼1856년 작)

[금빛내렴의 성화묵상] 종의 모습으로 섬기는 위대한 이 기사의 사진
포드 매덕스 브라운(1821∼1893), 캔버스에 유화, 116.8×133.3㎝, 영국 테이트브리튼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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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력이 융성한 빅토리아여왕 시대엔 영국인 모두가 잘나갔던가. 자본주의 발전과 도시화로 인한 부작용 또한 컸다. 부유하고 성공한 이들보다 가난한 노동자, 실업자, 부랑자, 노동착취를 당하는 아동이 더 많았다. 이는 당시 문학에서도 표현된다. 풍요의 시대에 허위의식 가득하고 물질주의에 매몰된 사람들은 서로 어떤 관계를 맺었을까. ‘빅토리안(Victorian)’이라는 말이 ‘빅토리아조(朝)풍(風)의’ ‘빅토리아 시대 사람 같은’ 뜻 외에 ‘오만 편협 인습 엄격 점잔 체면치레 흠잡기 물질주의를 특징으로 한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은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단기간에 산업화를 이뤄 주목을 받고 세계무역 순위가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대한민국은 어떤가. 안타깝게도 ‘빅토리아 시대 같은’ 특징들이 재현되는 느낌은 왜일까. 직원이 업주보다 높지 않고, 파견 받은 이가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음은 ‘업무상’ ‘직책상’으로는 사실이다. 허나 이것이 인격적 존재로도 높고 낮음이 고착됐음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신의 권한을 남용하는 것을 최근 우리는 ‘갑질’이라 일컫고 있다. 물질의 부족보다는 관계의 빈곤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현실의 서글픈 조어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적 화가로 종교화뿐 아니라 사회문제를 주제로 삼은 것으로 유명한 포드 매덕스 브라운의 이 그림을 보자. 예수 머리의 후광만 아니라면 이 그림은 영락없이 어느 집안의 가장 낮은 하인이 지체 높은 분의 발을 씻기며 섬기는 모습이다. 화가는 저녁식사 도중 제자들의 발을 차례로 씻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허 찔린 듯 난감한 제자들의 모습을 대비해 묘사하고 있다(요 13:1∼20). 위쪽 제자들의 모습은 다양하다. 순서를 기다리며 샌들 끈을 푸는 이, 부끄러워 머리를 감싼 이, 상황을 설명하는 이, 두 손을 맞잡고 감동하는 듯한 이 등. 그리고 대각선 구도 속에 두 주인공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왼쪽 아래 예수는 무릎을 꿇었다, 머리를 숙였다, 두 손으로 정성껏 발의 물기를 수건으로 닦아준다. 누군가의 발을 씻어주기 위해선 이런 포즈를 취할 수밖에 없다. 오른쪽에 높게 앉은 베드로는 몇 번 이의제기를 했지만 이젠 이 순간을 받아들이고 있다. 황송하여 두 손을 깍지 껴 무릎 위에 올린 상태로 다소곳이 지켜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왜 이러한 행동을 했을까.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 13:15) 그분은 두 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섬김의 방법을 제시한다(요 13:4∼5). 첫째, 섬김을 위한 준비. 식탁에서 일어나라, 겉옷을 벗어라, 수건을 허리에 둘러라. 즉 일상의 안온한 삶을 잠시 중지하고, 겉모습을 내려놓고, 앞치마나 수건을 두르듯 겸손한 마음을 지닐 것.

둘째, 섬김의 구체적 실행. 대야에 물을 담아라, 상대방의 발을 씻기라, 수건으로 닦아주라. 즉 말로만 아니라 실제적 방도를 갖추고 나를 낮춤으로써 상대를 최대로 존중하는 행동을 하고 끝까지 겸손하게 마무리할 것. 이 일로 그분이 강조하는 핵심은 다음 말씀에 있다. “너희 가운데서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 23:11) 스스로 낮춰 겸손과 배려, 관용과 존중, 그리고 공감을 발휘하며 섬기는 것, 이것이야말로 저절로 높아지는 비결이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하면, 복이 있다.”(요 13:7) <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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