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민태원] 생명윤리법 개정 신중해야 기사의 사진
유전자 편집, 세 부모 아기 같은 새롭게 등장한 첨단 생명과학 이슈는 언제나 뜨거운 감자다. 얼마 전 한국과 미국 과학자들이 유전자 가위 기술을 이용해 사람의 배아(胚芽)에서 유전병(비후성 심근증)을 일으키는 돌연변이 유전자를 교정하는 데 성공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인간 배아의 독특한 도덕적 지위 때문에 생명윤리 논쟁이 다시 불거졌다.

배아는 정자와 난자 수정 후 몇 번의 세포분열과 분화를 거쳐 태아가 되기 전 단계를 말한다. 유전자 가위는 유전체(게놈)에서 DNA 염기서열의 손상된 부위를 잘라 내거나 새로운 걸 끼워 넣는 방식으로 편집하는 기술이다. 10여년 전부터 동식물을 대상으로 연구가 진행돼 왔는데, 최근 사람 배아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인간 배아에 대한 유전자 편집 실험은 2015년 중국 연구진이 처음 공개한 후 모두 3차례 이뤄졌으나 서방에서는 최초의 일이다. 여기에 한국 과학자가 참여하면서 논란이 됐다.

국내에선 연구 목적 배아의 생산과 연구가 불법이다. 한국 연구진도 그걸 의식해 최적의 유전자 가위를 만들어 제공하는 역할만 했고 실험은 미국이 진행했다고 강변한다. 하지만 국내법을 피해 규제가 느슨한 외국의 연구에 참여한 게 적절했는지는 따져볼 일이다. 한국 연구진은 이번 실험 성공으로 출생 전에 위험인자를 차단함으로써 1만 가지가 넘는 유전질환의 대물림 고통을 덜어줄 길이 열렸다고 말한다. 나아가 “국내 생명윤리법을 고쳐 인간 배아 연구와 생식세포 편집을 제한적으로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행 생명윤리법은 정자와 난자, 배아, 태아에 대한 유전자 치료를 금지하고 있다. 다만 대통령령으로 인공수정 시술에 쓰고 남은 배아에 한해 일부 연구가 허용된다. 과학계는 이번 연구가 유전자 편집 기술의 효율성 측면에서 진일보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인간 배아 대상 연구를 가속화시켜 오남용 가능성을 높인 것도 사실이다. 지능이나 외모 관련 유전자를 원하는 대로 바꾸는 ‘맞춤형 아기’(디자이너 베이비)로 악용되거나 미래 유전자 계급화를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된다.

보건복지부는 4차 산업혁명의 핵심으로 부상한 유전체 등 신기술 연구를 활성화하고 그에 맞는 합리적 규제를 담은 생명윤리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 3월 각계 전문가로 구성된 민관협의체를 꾸려 수차례 회의를 열었다. 하지만 인간 배아 연구 허용 범위 등을 놓고 과학·산업계와 종교·윤리계가 좀처럼 간극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 복지부는 조만간 민관협의체 보고서와 공청회 등을 바탕으로 생명윤리법 개정 방향을 정할 방침이다. 그러는 사이 일부 언론을 통해 복지부가 배아 연구 허용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는 보도가 흘러나왔다. 정부가 이미 방향을 정해놓고 서두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과학기술의 진보에 따라 낡은 법·제도의 손질이 필요한 건 맞다. 그러나 인간 배아 대상 유전자 편집처럼 파급력이 크면서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기술에 대한 규제 논의는 충분한 시간을 갖고 이뤄져야 하고 사회적 합의로 결정돼야 한다. 2015년 초 세 부모 아기 기술 연구를 허용한 영국의 경우 무려 17년간 전문가와 일반 시민들의 토론 및 논쟁을 거쳐 관련 법령을 통과시켰다는 사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특히 윤리적으로 민감한 연구는 의학적 효용성을 강조함으로써 정당성을 얻으려는 욕구가 강하다. 임상적 이익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첨단 과학기술을 사회적으로 어떻게 활용할지 결정할 때는 몇몇 전문가나 몇 번의 공청회를 통한 논의를 넘어 사회적 공론화 과정이 중요하다. 그래야 의사결정의 정당성과 투명성이 높아질 뿐 아니라 연구의 정당성도 확보할 수 있다. 우리는 사회적 합의가 없는 소수의 일방적 연구 추진이나 이를 위한 법적 기반의 정비가 과거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똑똑히 봤다. 12년 전 ‘황우석 논문조작 사건’으로 얻은 뼈아픈 교훈이다.

민태원 사회부 차장 tw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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