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찬 심진경의 명작은 시대다]  살아남음의 치욕과 숭고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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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년(1636)의 나날을 ‘조선왕조실록’은 시종 이렇게 적고 있다.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다.” 병자년 겨울,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김훈의 역사소설 ‘남한산성’은 바로 그 참담한 역사적 사실의 현장을 집요하게 파고 든 소설이다. 도성을 버린 임금이 남한산성에 피신해 고립됐다. 주전(主戰)과 주화(主和)를 간언하는 대신들의 공허한 말들이 부딪치고 성을 지키는 군병들은 혹심한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간다. 성문을 열고 나가거나 안에서 버티거나, 청의 황제가 오거나 안 오거나, 살아서 죽거나 죽어서 살거나, 어차피 길은 하나, 사태는 속수무책이다. 김훈의 ‘남한산성’은 성 안에서 조선을 침략한 청병(淸兵)과 대치하다 결국 청의 황제 앞에 머리를 찧고 조아린 그 47일간의 고립과 치욕의 역사를 기록했다.

‘남한산성’의 김훈은 문제적인 작가다. 김훈의 소설에 대해선 찬사만큼이나 거부감도 만만치 않고 그를 평가하는 명칭도 극명하게 갈린다. 탐미주의자, 문체주의자, 리얼리스트, 보수주의자, 파시스트, 여성혐오론자 등등 …. 김훈과 그의 소설을 둘러싸고 서로 격렬하게 부딪치는 이 다양한 명명 자체가 이미 2000년대 소설계에서 그의 논쟁적인 문제성을 그대로 대변한다. 거꾸로 보면 이는 김훈 소설의 대중적 영향력이 그만큼 강력했음을 반증한다. 실제 김훈의 역사소설은 2000년대 독서시장을 뒤흔들었다. ‘칼의 노래’(2001)에서 ‘현의 노래’(2004)를 거쳐 ‘남한산성’으로 이어진 김훈의 역사소설 열풍은 2000년대의 시대적 징후라 할 만했다. 특히 적 앞에 홀로 선 이순신의 고독한 싸움의 허무를 그린 ‘칼의 노래’는 열렬한 대중적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탄핵 소추 후 ‘칼의 노래’를 읽어 화제가 되었고 그후 많은 이들이 그 탐독의 대열에 줄서 동참했던 일화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남한산성’도 못지않았고 드디어 올해 100쇄를 넘어설 정도로 지속적인 대중적 지지를 확보했다. ‘남한산성’은 김훈의 앞선 두 역사소설을 관통하는 특징을 그대로 이어받는다. 배경은 전쟁이다. ‘칼의 노래’가 임진왜란을, ‘현의 노래’가 신라의 가야 정벌전쟁을 무대로 한 것처럼 ‘남한산성’ 또한 병자년의 호란(胡亂)을 무대로 삼는다. 김훈의 소설이 그리는 전쟁은 의미와 가치가 제거된 참혹의 세계다. 이념과 명분과 당위 따위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엔 오직 무자비한 살육과 무의미한 죽음만이 가득하다. 살이 찢기고 목이 잘리며 피가 튀는 도륙의 풍경을 묘사하는 작가의 시선은 시종일관 냉담하다. 전란의 장소는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무의미한 싸움을 견뎌야 하는 곳이고,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치욕을 무릅써야 하는 곳이다. 다름 아닌 그곳이 지옥이다. 홀로 이 지옥을 견디는 자의 고독한 신음과 냉정한 허무가 김훈의 소설을 지배한다.

김훈의 역사소설은 그래서 민족주의 이념이나 민중적 세계관이 끌어갔던 기존의 수다한 역사소설과는 판이하다. 김훈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충실하고 정확한 재현이나 관념적 해석 따위엔 관심이 없다. 그가 그리는 역사란 그저 자신이 생각하는 한국적 삶의 어떤 본질을 투사하는 대상일 뿐이다. 김훈의 저 지옥이란 어디인가? 그곳이 바로 오늘의 한국이다. 그에 따르면, 삶은 전쟁터다. 그곳엔 오직 약육강식의 생존 논리만이 지배한다. ‘남한산성’의 최명길은 그 세상의 이치를 이렇게 말한다.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못할 짓이 없고, 약한 자 또한 살아남기 위하여 못할 짓이 없는 것이옵니다.” 세상은 그런 곳이다. 하여 운명처럼 주어진 무의미한 싸움을 지속하며 치욕을 무릅써야 하는 곳, 그래서 살아남음의 무참함을 홀로 견디면서 울음을 삼키며 신음해야 하는 곳,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라도 살아내야 하는 곳. 그 삶의 전장(戰場)이 작가가 생각하는 지금 이곳의 본질이다.

‘남한산성’의 성 안이 바로 그곳이다. 김훈의 ‘남한산성’은 단지 민족의 치욕을 환기하는 역사소설이 아니다. 이 소설엔 외세에 짓밟힌 치욕에 대한 민족주의적 의분(義憤)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주전파와 주화파의 시시비비도 이 소설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찌 되든 마찬가지다. 이 소설은 그저 어떻게 혹한과 굶주림과 죽음의 공포와 치욕을 헤쳐내고 살아남았는가의 기록이다. 무서운 것은 성을 포위한 적병이 아니다. 적보다 무서운 것은 몸을 얼리는 추위와 맹렬한 허기 앞의 무방비이고, 냉정하고 잔인한 자연의 순환 앞의 속수무책이다.

어둠 저편 가장자리에 보이지 않는 적들이 자욱했다. 이십만이라고도 했고, 삼십만이라고도 했는데, 자욱해서 헤아릴 수 없었다. 적병은 눈보라나 안개와 같았다. 성을 포위한 적병보다도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면서 종적을 감추는 시간의 대열이 더 두렵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아무도 아침과 저녁에서 달아날 수 없었다. 새벽과 저녁나절에 빛과 어둠은 서로 스미면서 갈라섰고, 모두들 그 푸르고 차가운 시간의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아무도 시간의 대열에서 도망칠 수 없다. 그 잔인한 시간 앞에서 모두는 속절없이 무력하다. 다만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는 그 참담한 사실만이 오롯할 뿐. 그런데 그 시간이란 대체 무엇의 이름인가? 그것은 먹고 자고 몸을 부지해야만 목숨을 이어갈 수 있는 냉엄한 자연의 이치와 직결된다. 그것은 성 안에 고립돼 어쩔 수 없이 목전에 당면한, 피할 수 없는 고통이다. 그 고통을 무릅쓰고 성 안에서 버틸 수 있는지, 아니 버텨야 하는 것인지, 영의정 김류는 생각한다.

백성의 초가지붕을 벗기고 군병들의 깔개를 빼앗아 주린 말을 먹이고, 배불리 먹인 말들이 다시 주려서 굶어 죽고, 굶어 죽은 말을 삶아서 군병을 먹이고, 깔개를 빼앗긴 군병들이 성첩에서 얼어 죽는 순환의 고리가 김류의 마음에 떠올랐다. 버티는 힘이 다하는 날에 버티는 고통은 끝날 것이고, 버티는 고통이 끝나는 날에는 버티어야 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었는데, 바티어야 할 것이 모두 소멸할 때까지 버티어야 하는 것인지 김류는 생각했다.

이것은 도저히 어떻게 손써볼 수도 없는 속수무책의 상황이다. 적병의 거대한 위력이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이 절박한 생존의 고통이 또한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 둘은 하나다. ‘남한산성’의 인물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이 어쩔 수 없는 진실에 압도되고 전율하고 신음한다. 이들에 따르면,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영의정 김류도 말한다. “부딪쳐서 싸우거나 피해서 버티거나 맞아들여서 숙이거나 간에 …세상은 되어지는 대로 되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옵니다.” 어떻게든 결론은 마찬가지다. 작가는 성의 운명을 놓고 여기저기서 “낮게 깔려서 뒤섞이고 부딪치는 말들”도 “대부분 ‘마찬가지’로 끝났다”고 적는다. ‘남한산성’의 지배적인 정조는 이렇게 주체를 압도하는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무력하게 신음하는 자의 도저한 체념이다. 그리하여 ‘남한산성’의 주제는 이 한마디로 요약된다. “참혹하여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다만 당면한 일을 당면할 뿐이다.” 삶은 더 이상 어찌해볼 수 없는 것이고, 다만 당면해 살아갈 뿐이다.

김훈의 소설에 따르면 인간이란 그런 존재다. 압도적인 현실과 생존의 논리 앞에서 무력하게 삶의 치욕을 견디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여기엔 어떤 대의도 명분도 개입할 여지가 없다. 이 잔인한 사실을 가리는 말과 언어와 관념이란 모두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남한산성’에서 작가는 허공에서 공허하게 부딪치는 대신들의 말을 기록할 가치도 없는 “기름진 뱀”의 언어로 비유하며 냉소한다. 예조판서 김상헌도 탄식한다. “글은 멀고 몸은 가깝구나….” 중요한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해 살아남는 것이다. 무슨 짓을 해서든 먹어야 하고 먹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김훈이 말하는 이 생물학적 진실의 표현이 바로 ‘끼니’다. 끼니의 생태학이라 해도 될 만큼 ‘남한산성’에 먹고 먹이는 장면이 시종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인식의 표현이다. 말을 죽여 주린 군병을 먹이고, 백성의 초가를 헐어 죽어가는 말을 먹인다. 임금도 먹고 말도 먹고 군병도 먹는다. 김훈의 ‘남한산성’은 그렇게 비루하지만 가벼이 할 수 없는, 그냥 그렇게 먹고 살아내는 일의 비애를 기록한다.

‘남한산성’의 이런 면모가 1997년 IMF 구제금융 이후 본격화된 무한경쟁의 와중에 나날의 생존을 걱정해야 했던 2000년대 대중들의 삶의 불안 및 비애와 흥미로운 접점을 형성한 것만은 분명하다. 주어진 현실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다만 그 안에서 살아남는 것만을 지상의 가치로 내면화하던 대중의식의 풍경에, 김훈의 소설은 맞춤한 알리바이를 제공했다. ‘먹고 살아야 한다’는 생존의 절박함에 압도된 대중의 의식은 그 비루한 생존의 비애를 비장한 톤으로 미학화하는 김훈의 소설에 자연스럽게 동화되고 위안 받았을 것이다. 먹고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것만이 영원하다. 김훈이 생각하는 인간은 그런 존재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김훈이 생각하는 그런 인간의 현실이란 그 또한 또 하나의 자기중심적 관념이자 이데올로기에 불과함을 여기서 굳이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 김훈
문학기자로 필력 인정… ‘칼의 노래’로 대표작가 반열에


김훈(69·사진)은 47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문학계간지 ‘문학동네’ 창간호에 일상 속에서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소방대원을 주인공으로 한 장편소설 ‘빗살무늬토기의 추억’(1995)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소설가로 활동한다. 김훈은 그 전에 한국일보 문학담당 기자로 1986년부터 3년간 ‘명작의 무대-문학기행’을 신문에 연재하면서 이미 문필가로서 명성을 얻고 있었다. 게다가 기자 시절 황석영 조정래 등의 여러 작가들과 의미 있는 인연을 맺고 있던 터라 김훈의 문단 데뷔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김훈은 뛰어난 문장가다. 이는 단지 문장의 조탁과 세련(洗鍊)에만 능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물과 풍경에 대한 민감한 감응력과 이를 언어로 포착하고자 하는 안타까운 집중력,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상황을 관조하는 냉담함이야말로 김훈 특유의 건조하면서도 냉철한 문장을 만들어내는 동력이다. 그래서 문학평론가이자 시인인 남진우는 김훈을 가리켜 “문장가라는 예스러운 명칭이 어색하지 않은 우리 세대의 몇 안 되는 글쟁이 중의 하나”라고 평했다.

화제작 ‘칼의 노래’(2001)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도 바로 건조하면서도 시적인 단문이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충무공 이순신을 민족 영웅이라기보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존재로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을 먹고 사는 일의 연장이자 피와 살이 튀는 육탄전의 세계로 다루어 많은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칼의 노래’는 100만부 넘게 판매되었으며 작가에게 제32회 동인문학상을 안겨주기도 했다.

이후 출간하는 소설마다 대중들의 관심과 지지를 받으며 한국대표 작가로 확고한 지위를 얻게 된다. 대표작으로는 단편소설집 ‘강산무진’(2006), 장편소설 ‘현의 노래’(2004) ‘남한산성’(2007) ‘흑산’(2011) ‘공터에서’(2017), 에세이집 ‘문학기행’(공저·1986) ‘풍경과 상처’(1994) ‘자전거 여행’(2000) ‘밥벌이의 지겨움’(2003) ‘라면을 끓이며’(2015) 등이 있다. 단편소설 ‘화장’(2004)으로 이상문학상을, ‘언니의 폐경’(2005)으로 황순원문학상을, 장편소설 ‘남한산성’으로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김영찬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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