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고승욱] 광마집 기사의 사진
마광수를 처음 접한 건 1983년이었다. 문학반 반장이던 친구가 “이 사람이 우리 서클 선배야”라며 ‘광마집(狂馬集)’을 건넸다. 시의 맛도 멋도 모르고 허겁지겁 읽던 고교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눈에 확 들어왔다. 친한 친구끼리 나누는 별로 중요치 않은 이야기를 단정하게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데서나 잠들지 못하고, 짜장면을 30초 안에 먹지 못해 귀하게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시 ‘귀골(貴骨)’은 한동안 머릿속에서 뱅뱅 돌았다. 도서관에서 “자조감을 독특한 유머로 표현했다”는 신문기사를 찾았는데 그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

대학생이 되자마자 마광수 교수의 수업을 들었다. 그는 이미 스타였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시로 유명했다. 수업 내용은 그냥 그랬다. 손가락과 손톱 이야기는 너무 자주 들어서 재미없었다. 이미 고교에서 플레이보이와 펜트하우스로 영어 실력을 갈고 닦았던 터였다. 학교 앞 ‘일동 프로덕션’에서 동문회의 대미를 장식하고 다음날 들은 수업은 시시했다. 성적 담론을 제도권으로 옮겼다지만 여드름이 가시지 않은 대학 1학년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플레이보이에서 본 수필 몇 구절을 가공해 제출하고 적당히 학점을 챙겼다. 이후 마광수라는 이름을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다.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야한 여자 손톱이 어떻고, 장미여관에 사라가 어떻다는 농담 정도가 전부였다.

마 교수의 안타까운 별세 소식을 접하고는 “세상을 너무 빨리 살았다”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조금도 야하지 않을 이야기에 온 세상이 호들갑을 떨었다. 선정적이라기에는 어딘가 부족한 책이었는데 난리를 쳤다. 2017년 신입생을 앉혀놓고 강의했다면 썰렁한 아재개그라고 놀림을 받았을 것이다. 세상이 조금 더 열려 있었다면 음란문서 반포 혐의로 구속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니 마 교수가 수갑을 차고 감옥에 다녀오면서 세상을 조금 더 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글=고승욱 논설위원, 삽화=이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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