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뷰-이승구] 루터의 종교개혁과 우리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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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10월이면 우리는 종교개혁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올해는 더 그리 해야 할 것입니다. 2017년이 다 지나도 우리 교회가 종교개혁의 정신을 반영하지 못한다면 종교개혁을 기념한다는 것이 그야말로 큰 희극(comedy)이 되고 맙니다. 이런 희극이 현실이 되지 않도록 만들 책임이 우리의 존재에 실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를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문제 몇 가지를 지적해, 적어도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일이 지나가기 전에 이 문제들이 우리에게서 사라지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첫째, 우리는 루터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에 근거해 모든 것을 생각하려고 하고, 실천하려고 했다는 것을 말해야 합니다. 루터와 그를 따르는 개혁자들에게는 ‘오직 성경’이 신앙(즉,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과 삶(즉,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유일한 준칙(準則)이요, 권위였습니다. 종교개혁 이전에도 형식적으로 성경이 중요했습니다만 성경이 성도들에게 전달되지도, 가르쳐지지도 않았습니다. 이에 반해 루터와 개혁자들은 성경이 우리에게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따라서 우리 모두가 오직 성경에 근거해 생각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직 성경’을 종교개혁의 형식적 원리라고 표현해 왔습니다.

구체적으로 루터가 적용한 몇 가지 문제만을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당시 천주교회의 신부였던 루터는 ‘오직 성경’에 근거해 생각해 볼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영단번(once for all: 단 한 번이지만 영원한)에 드려진 희생제사(sacrifice), 구약의 모든 제사를 다 성취하신 본래적 희생제사인 십자가의 구속 사건에 근거해 보면 우리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이제 더 이상 희생제사가 아니라고 하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집례하는 사람도 제사장이 아닌 것이지요. 그래서 루터가 처음으로 섬기는 자라는 뜻에서 목사(minister)라는 말을 썼습니다.(물론 루터와 루터파 사람들, 성공회 사람들은 사제라는 말과 목사라는 말을 병기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이를 분명히 한다는 한국 교회 안에 아직도 예배가 일종의 희생제사인 것처럼 여기는 생각과 말들이 많이 통용되는 것은 종교개혁의 정신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않다는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일천번제’와 같은 용어가 사용되는 것이 그런 예의 하나입니다.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일컫는 것에도 철저하지 않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언어와 생각이 과연 ‘오직 성경’에 근거한 것인지 심각하게 자성해야 하고, 성경에 비추어 잘못된 것이라면 제거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런 것이 종교개혁의 형식적 원리인 ‘오직 성경’에 충실한 것입니다.

둘째로, ‘오직 성경’의 원리에 근거해 생각할 때 루터와 개혁자들이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뿐이라고 주장했던 바를 깊이 있게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날은 이런 생각이 비성경적이라고, 바울이 말한 바에 충실하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이 얼마나 반어적(ironical)인 상황입니까. 개혁자들이 강조한 ‘오직 성경’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사실은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을 다 파괴하는 일들도 나타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이 매우 개탄스럽습니다.

루터를 비롯한 개혁자들은 우리가 구원함을 받는 것이 우리의 행한 바에 의존할 수가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만 의존한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그 사실을 참으로 받아들이고 믿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의가 전가됨을 선언하면서 이제 예수님만을 철저히 의존하는 믿음에 근거해 의롭다 함을 받았고, 이렇게 칭의함을 받은 이들이 평생 감사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원토록 감사의 경배를 올려드리고, 또한 감사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신칭의의 교리이고, 이것을 ‘종교개혁의 내용적 원리’라고 했습니다.

올해 이 같은 종교개혁 원리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으면 합니다. 종교개혁의 형식적 원리라고 하는 ‘오직 성경’에 충실해 생각과 실천의 변화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는 일의 하나가 ‘이신칭의’에 참으로 충실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들만이 루터와 개혁자들의 참된 후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글=이승구(합동신학대학원대 교수·조직신학), 삽화=공희정 기자

※이 칼럼은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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