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동 칼럼] 다시 언론자유를 생각한다 기사의 사진
민주주의 성숙도를 가늠할 때 어느 수준의 언론자유를 보장하고 있는가를 종종 척도로 삼는다. 민주주의가 정착된 사회에서 언론자유는 불가역적 가치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에서 유효한 기준이다. 언론이 권력에 아첨하는 사회, 또는 권력이 언론을 통제하는 국가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우리는 어떠한가. 부끄럽게도 언론은 힘이 빠진 정권 말기나 다음 정권에선 돌변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마치 썩은 고기를 물어뜯는 하이에나처럼. 물론 ‘정의’의 이름으로….

정의가 수단으로 전락할 때 그 사회의 앞날은 암울하다. 정의는 독점할 수도, 독점해서도 안 되는 가치다. 독점된 정의는 독재다. 그런 사회에선 폴리페서가 득세하고 곡학아세도 넘친다. 그럴듯한 의미도 부여된다. 참여정부 때 장관을 지냈던 유시민 작가는 ‘진보’ 어용 지식인이 되겠다고 했다. 어용 지식인도 얼토당토않지만 진보 어용 지식인은 더 말이 안 된다. 일종의 기만이다. 나치 시대 선전장관이었던 괴벨스가 말했던가.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그러면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고.

토머스 제퍼슨은 “신문 없는 정부와 정부 없는 신문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할 것”이라고 했다. 언론자유에 대한 가장 극적인 언급이다. 200년이 더 지난 지금에도 이 말은 언론자유의 경전으로 전해진다. 이처럼 언론자유를 열렬히 지지했던 그였으나 대통령이 된 후 달라졌다. ‘법대로’를 강조하며 언론인을 감옥에 집어넣어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하지하책이다. 오해 마시라. 치외법권적 지위를 누릴 수 있다거나 책임에서 자유롭다는 주장이 아니다. 견제와 균형을 말하고자 함이다.

권력과 언론의 관계가 불편한 것은 지극히 정상이다. 고의로 불편할 것까진 없지만 정상적이라면 불편한 사이일 수밖에 없다. 권력을 감시하는 게 언론의 역할이니 권력 입장에선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하다. 이렇듯 민주주의는 언론과 권력의 갈등관계 속에서 성장했다. 건강한 긴장관계다. 돌이켜보면 언론이 권력을 추구할 때 또는 권력이 언론을 장악하려 할 때 불행했다. 권력과 언론의 역학관계를 거슬렀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대사를 통해 이런 비상식을 수없이 봤다.

듣기 좋은 소리는 솔깃하다. 하지만 영혼을 더럽힌다. 언론과 권력의 관계도 그렇다. 맹목적 지지 또는 무비판은 소금기 빠진 생선처럼 속을 썩게 만든다. 권력에 굴종해서 곡필을 휘둘렀던 수치의 역사에서 경험한 바다. 권력과 언론은 때론 적, 때론 동지였다. 군사정권은 언론을 수단화했다. 언론은 귀를 막았고, 눈을 감았다. 김영삼(YS) 대통령이나 김대중(DJ) 대통령 모두 집권 초엔 우호적이었으나 권력의 맛에 빠진 이후 달라졌다. DJ는 “비판 없는 찬양보다 우정 있는 비판이 낫다”는 멋진 말을 했는가 하면 “나도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고 언론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랬던 DJ도 초심을 유지하지는 못했다. 알다시피 노무현정부 언론정책의 골간은 견제와 균형이었으나 결과적으로 대결과 갈등의 연속이었고 사달이 났다. 박근혜정부의 언론관은 불신과 불통이었다. 그래도 ‘정부 없는 신문’을 강조할 정도로 언론은 민주주의 발전에 큰 역할을 감당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언론관은 무엇인가. 문 대통령은 정책공약집 ‘나라를 나라답게’에서 언론자유와 독립을 약속했다. 한데 현실은 좀 헷갈리고 거칠다. 김장겸 MBC 사장 체포영장에선 법의 만능을 본다. 집권당에서 만들었다는 언론 문건도 이해하기 힘들다. 어색함을 넘어 위험하다. 보수정권이나 진보정권이나 도긴개긴이다. 대통령은 “언론이 없는 좋은 사회보다 나쁜 언론이 있는 사회가 더 낫다는 말처럼,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정당한 보도와 평가에 대한 가치는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언론 장악 시도를 하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한다”고도 말했다. 전적으로 옳은 견해다. 지금도 대통령의 약속은 유효한가.

박현동 논설위원 겸 국민CTS대표 hdpark@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