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MB)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이 작성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검찰 수중에 넘어왔다. 검찰은 곧장 피해 실태 파악에 나섰다. 당시 정부가 공권력을 동원해 엄연히 민간 영역에 속한 예술계 인사들을 사찰하고 퇴출했다는 게 국정원 자체 조사 결과다. 국정원은 심지어 MB정부에 비판적이었던 배우들의 나체 합성사진까지 만들어 유포한 것으로 밝혀졌다. MB정부의 문화예술계 농단 전반으로 수사가 확대될 수 있다.

서울중앙지검은 14일 MB정부 시절 문화예술계 내 정부 비판 세력 퇴출 활동을 주도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주성 전 국정원 기획조정실장에 대해 국정원이 국가정보원법상 직권남용 혐의로 수사를 의뢰했다고 밝혔다.

국정원 댓글 사건을 수사 중인 공안2부(부장검사 진재선)와 공공형사수사부(부장검사 김성훈)가 수사를 맡았다. 검찰 관계자는 “공소시효 등을 검토해 신속하고 철저하게 수사하겠다”고 말했다. 검찰은 수사팀 확대 편성도 검토하고 있다.

앞서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는 자체 조사 결과, 국정원이 원 전 원장 재임 시절인 2009년 7월 당시 김 기조실장 주도로 ‘좌파 연예인 대응 태스크포스(TF)’를 설치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 TF는 정부에 비판적인 문화예술계 인사를 특정 방송 프로그램에서 배제하거나 퇴출시켰다. 소속사에 대해 세무조사를 실시하는가 하면 방송편성 관계자의 인사 조치를 유도하는 등 압박도 가했다.

블랙리스트 명단에는 문화계 인사 6명, 배우 8명, 영화감독 52명, 방송인 8명, 가수 8명 등 모두 82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소설가 조정래, 영화감독 박찬욱 이창동, 방송인 김미화 김제동, 가수 윤도현 등 유명 인사가 대거 포함됐다.

이 가운데 배우 문성근씨가 오는 18일 첫 번째로 검찰에 출석해 조사를 받는다. 국정원 심리전단은 2011년 문씨와 배우 김여진씨가 나체로 껴안고 있는 합성 사진을 제작해 유포했다. ‘공화국 인민배우 문성근, 김여진 주연’이라는 문구도 넣었다. 이와 관련해 “특수공작에 나서겠다”는 내용의 보고서도 작성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이처럼 구체적인 피해 정황을 파악한 뒤 필요한 경우 해당 인사를 불러 진술을 청취할 방침이다.

향후 검찰 수사는 원 전 원장 등 국정원 관계자를 거쳐 MB정부 청와대를 향해 뻗어나갈 전망이다. 국정원은 ‘VIP(대통령) 일일보고’ ‘BH(청와대) 요청자료’ 등의 형태로 당시 청와대에 활동내용을 보고했고 청와대는 이를 지시했다. 방송 영화 광고 출판 등 문화예술계 전반을 무대로 자행된 농단 사건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 전방위 수사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검찰이 KBS MBC 등 공영방송 관계자를 상대로 ‘21세기판 보도지침’이 있었는지를 들여다볼 가능성도 있다.

검찰은 이날 수사 의뢰를 받아 국정원의 박원순 서울시장 비방 사건 수사에도 착수했다. 원 전 원장은 2011년 박 시장을 ‘종북(從北)’으로 규정하고 비방 활동을 지시한 혐의를 받고 있다.

신훈 기자 zorb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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