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김찬희] 금융의 길 기사의 사진
천대받던 일이었다. ‘돈놀이’라는 비아냥도 들어야 했다. 가진 돈(자본)을 빌려주고, 높은 이자를 받으며, 그 이자를 다시 빌려줘 또 이자를 벌어들이는 구조는 착취로 볼만했다. 다급한 이에게 돈을 꿔주고 갚지 못하면 담보로 잡은 땅과 집을 빼앗는 과정은 약탈에 다름 아니었다. 그래서 대금업을 바라보는 시선은 꽤 오랫동안 곱지 않았다. 구약성경에서 ‘너는 그에게 이자를 위하여 돈을 꾸어 주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네 양식을 꾸어 주지 말라’고 말할 정도였다. 교회는 초기부터 이자 수취를 금지했다. 다만 경제 현장에서 대금업은 사라지지 않았다. 교회의 ‘암묵적 허가’ 아래 명맥을 이어갔다.

유럽의 대금업은 르네상스, 대항해 시대를 거치면서 금융업의 꼴을 갖추기 시작했다. 무역의 비약적 발달은 ‘자금 중개’의 중요성을 한층 높였다. 그렇게 금융은 화폐 혹은 자본이라는 제한된 자원을 적재적소에 공급하는 ‘경제의 혈관’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의 금융은 개발연대 시절에 최전선에서 싸우는 기업들을 지원하는 ‘보급부대’였다. 다만 서민들에게 제도권 금융회사의 문턱은 너무 높았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려면 온갖 혈연, 지연, 학연을 동원해야 했다.

금융을 바라보는 시선은 1997년 외환위기,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극적으로 변했다. 은행이 무너지고 대규모 혈세(공적자금)가 투입되는 일을 겪으면서 금융의 위험관리, 경쟁력 강화는 국가적 과제로 떠올랐다. 성장의 핵심으로 여기고, 과도한 규제를 풀어 효율성을 높이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는 잊고 지냈던 단어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고삐 풀린 금융은 탐욕이라는 민낯을 드러냈다. 분노한 시민들은 2011년 미국 뉴욕에서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는 시위를 벌였다. 그 들불은 전 세계 100여개 도시로 번졌다.

시위의 이면에는 ‘금융이 부의 집중을 가속화시켰다’ ‘금융이 불평등의 주범’이라는 공감대가 깔려 있다. 고소득자일수록 낮은 이율로 대출받기 쉽다. 대출받은 돈으로 각종 상품과 자산에 투자해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인다. ‘21세기 자본론’을 쓴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학 교수의 지적처럼 ‘돈이 돈을 버는 속도’가 ‘노동이 돈을 버는 속도’보다 빠르면서 소득 불평등이 생긴다. 금융은 이 불평등의 골을 더 깊게 만든다. 더욱이 금융회사는 덩치 크고 돈을 많이 빌린 기업과 개인의 파산을 원치 않는다. 물린 돈이 많으니 계속 돈을 빌려주고 편의를 봐주게 된다. 로마 최고의 부자 크라수스가 카이사르에게 거액을 빌려준 것은 물론 다른 빚의 지불보증까지 서준 것처럼.

선진국 클럽이라고 불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이런 ‘금융의 그림자’에 주목하고 있다. OECD는 2015년 ‘지속 가능한 포용적 성장을 뒷받침하는 건강한 금융을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라는 정책보고서를 발간했다. 최근까지 금융업의 발전이 소득·부의 불균형을 심화시키는 문제를 고심하고 있다.

한국이라고 다르지 않다. 금융은 신생 벤처기업보다는 대기업, 기업보다는 담보가 확실하고 연체율이 낮은 가계에 쏠렸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이를 ‘전당포식 영업’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포용적 금융’ ‘생산적 금융’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사업성 있는 스타트업이나 서민에게 돈이 흐르게 하고, 빚의 굴레에서 신음하는 이들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며, 궁극적으로 서민의 주머니를 불려주는 금융으로 거듭나자는 것이다.

포용은 ‘함께’에 방점이 찍혀 있다. 포용과 만난 생산은 ‘더불어 성장’ ‘불평등의 해소’로 확장된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태풍 앞에 서 있는 금융에 포용과 생산은 변화의 시작이자 새로운 성장판이 될 수 있다. 변화는 늘 낯설고 두렵기 마련이지만, 제자리에 머물러봐야 얻을 게 없다. 우간다보다 못한 경쟁력이라지 않는가.

김찬희 경제부 차장 c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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