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라동철] 국정원 바로 세우기가 더 중요하다 기사의 사진
국가정보원의 지난 정부 시절 흑역사가 베일을 벗고 있다.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가 산하 적폐청산 태스크포스(TF)의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검찰 수사의뢰를 권고하며 밝힌 이명박정부 국정원의 불법행위는 충격적이다.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은 광범위한 여론조작, 정치적 비판세력에 대한 낙인찍기와 탄압 등은 과거 공작정치 망령을 떠올리게 한다. 지휘선상을 따라가다 보면 수사의 칼날이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까지 미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전망이 나오자 자유한국당은 ‘정치보복’이라며 발끈하고 나섰다. 검찰 수사나 재판 등을 통해 진위가 가려지겠지만 감찰실장 등 국정원 직원과 파견검사로 구성된 TF의 자체 조사결과인 만큼 그냥 묻어버릴 일은 아닌 것 같다. 국정원 개혁위에 따르면 이명박정부 국정원은 원세훈 당시 원장의 지시하에 공작정치의 판을 벌렸다. 심리전단팀(댓글부대)을 구성해 온라인 커뮤니티, 각종 SNS, 트위터 등에 청와대나 정부에 비판적인 인사들을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인사나 단체에는 ‘종북’ ‘좌파’ 딱지를 붙이고 공격했다. 당시 야권은 물론이고 한나라당 홍준표·안상수 대표나 정두언·원희룡 의원, 보수논객인 이상돈 교수 등 여권 인사들도 대상이었다. 우파 논객이 만든 인터넷 매체에 광고비를 지원하고, 보수단체에 비용을 대 여론을 호도하는 의견광고를 싣도록 사주했다. 민간기업이나 공공기관에 필요한 비용을 뜯어내기도 했다.

사법부도 공작정치 대상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판결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보수단체를 동원해 재판부를 비난하고 대법원장의 사퇴까지 촉구하는 광고를 일간지에 싣도록 했다. 비판적인 문화·예술인들은 블랙리스트로 묶어 방송 출연을 금지시키고 정부 기금 수혜나 지원사업 대상에서 원천 배제했다. 남녀 배우가 나체 상태로 끌어안고 있는 합성 사진을 만들어 온라인에 유포하기까지 했다. 유치한 네티즌들이나 하는 일이 국가의 최고 정보기관의 작품이라니 낯이 뜨거워진다. 공작정치의 종합판을 보는 듯하다.

국정원은 해서는 안 될 일에 열중하느라 본업은 내팽개쳤다. 북한 핵실험과 미사일 도발 징후 파악에 실패했고 살아있는 북한 고위인사를 사망했다고 밝히는 등 대북 정보에는 무능함을 드러내 신뢰를 잃었다. 유우성씨 간첩조작 사건도 이때 있었던 일이다. 요원들이 인도네시아 대통령 방한 특사단이 투숙한 호텔방에 잠입했다가 발각되고 유엔 특별보고관을 미행하다가 들켜 국제적 망신을 사기도 했다.

공작정치는 철저히 진상을 밝히고 관련자들에게 응분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국정원 바로 세우기다. 국정원이 국내 정치에 관여하지 않도록 정밀한 견제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정치 개입과 인권침해를 불가능하게 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상원과 하원에 정보위원회를 설치하고 CIA 등 정보기관에 대해 예산 등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미국처럼 우리도 국정원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 2013년 12월 4당 합의로 국정원법이 일부 개정됐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정치개입 논란을 부를 국내 정보수집 기능을 없앤 건 잘 한 일이다. 국회 정보위원회의 조사·감독권을 실효성을 높일 수 있는 수준까지 강화하는 등 다양한 방안이 검토될 수 있다. 국정원법 개정이 필요한데 정치권의 합의 없이는 불가능하다. 여야 구분없이 적극 협조해야 한다. 김영삼정부는 취임 첫해인 1993년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전격 해체해 군사쿠데타 가능성을 차단하고 군에 대한 문민통제 기반을 확립했다. 국민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이었다. 국정원을 국가안보와 국민보호를 위해 ‘소리 없이 헌신하는’ 정보기관 본연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 것도 그런 일이다. 국정원 수사가 정치공방으로 흐르면 개혁 동력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 여야 정치권은 검찰 수사를 차분히 지켜보면서 국정원 개혁 입법에 집중하는 게 좋겠다.

라동철 논설위원 rdchu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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