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 배우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5>] 크리스천은 숭고한 책임감 품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

[인문학으로 배우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5>] 크리스천은 숭고한 책임감 품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 기사의 사진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시상식 장면. 남승룡 선수의 가슴에는 일장기가 달려있고, 손기정 선수는 이를 화분으로 가리고 있다. 국민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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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문: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구주라고 부릅니까?

답: 그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구원하셨기 때문이며, 그런 까닭에 그분이 아닌 다른 누구에게서도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제32문: 당신은 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되었습니까?

답: 내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가족이 되어 그의 기름부음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34문: 왜 당신은 예수님을 우리 주님이라고 부릅니까?

답: 그분이 우리의 죗값을 그분의 피로 대신 갚아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를 마귀의 소유에서 하나님의 소유로 삼아주셨기 때문에 그분을 우리의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도신경과 성자(聖子)

지난 회까지 크리스천의 기본 신조인 사도신경을 언급했다. ‘사도신경’이란 말은 주후 390년 무렵 성 암브로시우스의 편지에서 등장했다. 그는 중세 교부철학을 주도한 성 어거스틴의 스승이었다.

사도신경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에 대한 믿음 체계로, 이것이 사도들의 전승이었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4세기 교회들의 신앙체계를 견고하게 쌓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사도신경 가운데 성자(聖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은 그의 탄생과 죽음, 부활, 승천, 재림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 엄밀히 말해 예수에 대한 이 부분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 종교개혁자들이 말하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내용이며, 이를 통해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의 ‘크리스천’이 되는 것이다.

‘크리스천’이라는 말은 행위(Doing)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체성(Being)과 관련된다. 그 속에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다. 사도신경을 의미 없이 고백하는 행위가 크리스천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크리스천이란 그 존재의 의미를 인식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죄에 오염되면서 죽음이라는 운명을 피할 수 없고,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다. 인간이 스스로 그 비참함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성부(聖父) 하나님은 구원 계획을 세웠다. 성부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유일한 아들 성자를 희생시킨 것을 신약성경에서는 ‘대속(代贖)’이라고 한다. 이 말은 로마시대 당시 상거래에 사용되던 용어로, 어떤 물건을 소유하기 위해 가치를 지불하는 것을 말한다. 로마시대의 노예를 구입하기 위해 그 몸값(Ransom)을 지불하면 그 노예의 소유권은 이전되며, 지불된 가격이 곧 노예의 가치(價値)다.

성부는 죄로 인해 죽음의 소유가 된 인간을 위해 당신의 아들을 값으로 치르고, 우리를 당신의 소유로 삼으셨다. 죽음에 우리의 값을 지불한 장소가 바로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다. 우리를 위해 성자는 죽어야 했고, 성부는 인간을 그의 아들인 그리스도의 가치로 간주한 것이다.



‘크리스천’이란 말의 참뜻과 유래

그리스도인을 뜻하는 ‘크리스천’은 자신에게 그리스도의 가치가 담겨 있고, 그를 대표하겠다고 고백하는 자들이다.

이 표현 속에는 그런 숭고한 의미와 함께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책임감’이 담겨 있다. 크리스천이라는 단어를 최초로 쓴 인물은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다. 그는 저서에서 크리스천이란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사람’이라고 밝힌다. 동시대 역사가 수에토니우스(Suetonius)도 같은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했다. 로마시대 역사가들의 기록에 표현된 명칭은 오늘날 ‘예수쟁이’처럼 경멸의 의미를 담은 표현이었다. 동시에 평범한 로마 시민들에게는, ‘그리스도처럼’ 도둑질이나 강도질 등 나쁜 일에 연루되지 않고,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뚜렷한 인식이 있었다. 그들은 동시대인들과는 구별되는 윤리의식과 양심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개신교도’라는 의미의 ‘프로테스탄트’ 역시 비슷하다. 1529년 독일 슈파이어회의 결정에 불복하고 항의하던 무리를 일컫던 말이다. ‘황제의 명령을 우습게 알고, 국가의 분란을 일으키기 위해 항거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에서 ‘프로테스탄트’가 나왔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만들어 구별된 양심으로 사는 사람들이었다.

영국의 ‘감리교도’ 역시 경멸적인 어조로 탄생된 말이지만 당시 ‘감리교도들’은 사람들이 보증 없이도 돈을 빌려줄 만큼, 신뢰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역사 속에서 크리스천이란 말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숭고한 의미와 더불어 엄중한 윤리적 책임감을 갖고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사람들이란 의미를 일관되게 품고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크리스천에게도 그런 의미가 뚜렷하게 투영돼 있는가. 한국교회와 크리스천은 과연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사람들인가.



대표를 상실한 슬픔과 굴욕

1936년 베를린올림픽이 열렸다. 올림픽의 꽃 마라톤 경기가 열렸고, 운동장에 1등으로 도착한 선수가 나타났다. 당시 운동장에 울려 퍼진 멘트가 독일 역사박물관 독일방송기록보관실에 남아있다. 그 순간 장내 아나운서는 “한국(koreanischer) 학생이 세계의 건각들을 가볍게 물리쳤습니다. 우승자 ‘손(Son)’이 막 결승선을 통과하고 있습니다!”라고 방송했다.

1등 주인공은 손기정 선수였다. 그리고 3위는 한국인 남승룡 선수가 차지했다. 그러나 1910년 나라를 빼앗긴 한국은 더 이상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우승자 이름은 손기정이 아니라 일본식 이름 ‘손기테이’였다. 그와 남승룡 선수의 가슴에는 일장기가 붙어있었다. 빼앗긴 조국 대신 일본을 대표할 수밖에 없었던 손기정 선수는 시상대 위에서 화분으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렸다. 손기정 선수는 지인에게 보낸 엽서에서 ‘슬푸다!!’는 말을 남겼다.

동메달리스트 남승룡 선수도 훗날 고백하기를, 베를린에서 가장 수치스러웠던 것은 금메달을 따지 못한 것이 아니라 가슴의 일장기를 가릴 수 없었다는 것이라고 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그들의 승전보를 전하면서, 사진 속 손기정 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했다. 이것이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사건’이다. 이로 인해 동아일보는 무기정간을 당했다. 대표할 나라를 상실한 것은 이처럼 한스럽고 굴욕적인 것이다.

우리가 ‘크리스천’이라는 말 속에 담긴 숭고함과 책임을 간과한다면 어떻게 될까.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가치관을 갖고 살아가는 모습이 없다면 과연 ‘그리스도’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을까. 세상과 구별되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우리 시대의 ‘크리스천’은 여러 종교인 중 하나를 뜻하는 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이런 현실을 보시면 무슨 말씀을 하실까. ‘슬프다!!’고 하시지 않을까.

▶나눔과 적용을 위해 생각해 볼 것은

☞ 만일 우리가 1936년을 살고 있다면,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올림픽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일까요?



☞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크리스천들이 그 본래의 의미를 회복하기 위해 개선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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