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박지훈] 희망 단상 기사의 사진

이전이미지다음이미지

줌파 라히리는 ‘단편의 여왕’으로 통하는 인도계 미국 소설가다. 크레바스처럼 갈라진 삶의 균열이나 심연을 그린 그의 작품은 엔간한 동시대 작가들의 수준을 뛰어넘는다. 그의 책을 읽다가 뭉근한 감동에 젖어 자간과 행간 사이에서 서성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소설집 ‘축복받은 집’이나 ‘그저 좋은 사람’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수긍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이 작가의 최고작을 묻는다면 단편이 아닌 장편, 그것도 그가 처음 내놨던 긴 이야기 ‘이름 뒤에 숨은 사랑’을 첫손에 꼽고 싶다.

작가는 ‘고골리’라는 특이한 이름의 남성을 내세워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난 한 인간의 이야기를 전한다. 책에선 고골리의 유년기와 청년기가 기다랗게 이어지는데, 마음을 뒤흔드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가장 코끝이 매워졌던 대목은 주인공이 아버지의 죽음을 마주한 뒤 전하는 추억담이다. 그의 가족은 종종 차를 타고 바다에 갔다. 언젠가 아버지는 어린 아들과 방파제를 걸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오늘 여기 왔던 것 기억할 거지?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데까지 우리가 같이 왔었다는 것을, 너와 내가 여기까지 함께 왔었다는 것을 기억해라.” 당신과 내가 함께 걸었다는 것, 그 사실을 기억하라는 당부에 책을 읽던 나는 무장해제 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저런 말은 많은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소설가 김연수가 낸 소설집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의 들머리를 장식하는 작품 ‘벚꽃 새해’도 그런 작품 중 하나다. 소설은 과거에 연인이었던 남녀가 다시 만나 우연히 하루를 보내게 되면서 겪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두 사람은 황학동 뒷골목에서 한 노인을 만나는데, 그 노인은 아내와 함께 보낸 시절을 회상하다가 이런 말을 덧붙인다. “지금까지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니 고맙고, 마지막으로 잔소리를 한마디 하자면, 어쩌다 이런 구석까지 찾아왔대도 그게 둘이서 걸은 길이라면 절대로 헛된 시간일 수 없는 것이라오.” 사람에 따라서는 얼마간 상투적인 덕담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 같은 대사는 세상의 그 어떤 말보다 독자의 마음을 살뜰하게 다독여주곤 한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썼던 글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신형철은 에세이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벚꽃 새해’를 짧게 거론하면서 노인을 통해 작가가 전하려 한 메시지를 이렇게 풀어썼다. “삶에 희망이 있다는 말은,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지난 시간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름 뒤에 숨은 사랑’에서 주인공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했던 말도 희망에 관한 이야기이지 않았을까. 지나간 모든 시간은 헛된 것이 아니니 앞으로 다가올 날들 역시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거라는 메시지, 삶이 아무리 힘겨워도 우린 미래를 꿈꿔야 한다는 것….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무슨 일이든 발생한 것은 역사로서 무의미하다고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 적 있는데, 이 말 역시 같은 뜻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할 듯하다.

희망은 곧 과거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희망에 관한 내용을 담은 책 중에선 미국의 여성인권운동가이자 역사가인 리베카 솔닛의 저서 ‘어둠 속의 희망’도 추천하고 싶다. 책은 참담한 실패의 역사에 깃든 희망의 흔적을 그러모은 사회성 짙은 에세이다.

표지엔 ‘절망의 시대에 변화를 꿈꾸는 법’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책에는 저자 특유의 미려한 문장이 간단없이 이어지는데, 이런 대목에선 어쩔 수 없이 밑줄부터 긋게 된다. “얼마나 많은 전쟁이 터지고, 얼마나 지구가 뜨거워지고, 무엇이 살아남을지는 우리의 행동 여부에 달려 있다. 미래는 어둡지만, 그 어둠은 무덤의 어둠인 동시에 자궁의 어둠이다.”

이 칼럼을 통해 난데없이 희망에 대한 객쩍은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 우리 사회가 어느덧 ‘촛불 1주년’을 앞두고 있어서다. 많은 시민이 박근혜정부의 국정 농단에 항의하며 처음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던 날짜는 지난해 10월 29일. 사람들은 어깨를 겯고 거리를 걸으며 희망을 이야기했다. 올해 4월 29일 마지막인 23차 촛불집회가 열릴 때까지 서로를 향해, 하늘을 향해 촛불을 들었다. 소슬한 가을바람이 부는 계절이 다시 찾아왔으니 1년 전 이맘때 품은 희망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 덧붙이자면 솔닛의 책엔 이런 문장이 담겨 있다. 과거는 미래라는 밤 속으로 들고 갈 횃불이 될 수 있다고.

글=박지훈 문화부 기자 lucidfall@kmib.co.kr, 삽화=공희정 기자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