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류길재] 안보는 보수세력의 전유물이 아니다 기사의 사진
한국의 보수는 안보를 중시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나라를 세웠고, 6·25 전쟁에서 북의 침략을 막아냈으며, 그 이후에도 북의 도발에 강력하게 대처함으로써 국가를 지키는 데 기여했다고 자처한다. 김대중·노무현정부의 대북 ‘퍼주기’로 북한 정권이 생존했고, 핵무기 개발도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안보는 보수의 전유물이고, 주특기인 셈이다. 그렇다면 지금과 같은 안보적 위기 상황에서 보수 세력은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거나, 해법 모색을 위한 진지한 태도를 보여야 하는 것이 옳다. 한국의 보수뿐만 아니라 어떤 사회의 보수도 안보를 최우선 가치로 삼는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가 안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보수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다. 그들은 문재인 진보 정부에게 지금의 위기를 돌파할 묘수를 내놓으라고 강변하기만 한다. 이는 과거 지금의 여당이 야당 시절에도 늘 해 왔던 행태의 반복이지만, 그래도 안보를 중시하는 보수라면 진보와는 달라야 하는 것 아닌가. 보수 정치세력은 자신들이 집권했을 때 이미 지금과 같은 위기가 벌어졌다는 사실은 망각한 채 지금의 정부에게만 모든 책임을 묻고 또 묻는다.

이들은 비현실적인 핵무장론이나 전술핵 배치만을 반복하고 있다. 대북 제재와 압박 일변도의 외눈박이 정책만을 고집하고 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코리아 패싱’이란 말로 스스로 한국의 외교적 위상을 깎아내리고 있다. 지금의 안보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묘수나 방략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묘수나 방략은 위기 상황에서 어쩌다 운 좋게 들어맞는 경우에나 존재하는 것이다.

핵무장을 하거나 전술핵을 배치한다고 해서 북의 핵무기 도발을 막을 수 있을까. 오히려 핵무장한 한반도는 동북아 핵 도미노를 촉진시킬 것이며, 북의 핵 폐기는 더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아니 중요한 것은 핵무장이나 전술핵 배치라는 의제가 하겠다고 해서 금세 되는 일도 아닐 뿐더러 국민들의 여론을 수렴하고, 특히 미국과의 협의가 매우 중요한 일인데 이것을 생떼 쓰듯 요구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만일 이런 방법으로만 가야 된다면 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전에 우리가 치러야 할 비용이 무엇인지 헤아려보고,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가늠해보는 것이 진정한 보수가 해야 할 일이다.

대북 제재와 압박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은 제재 국면이기 때문에 제재를 가해야 한다. 그러나 제재를 가한다고 해서 모든 일을 여기에만 맞추면 그 다음에 벌어질 협상 국면에서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 있다. 안보를 중시하는 보수 세력이라면 그런 국면까지 예상하면서 어떤 방안이 나라의 안보에 도움이 될지를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안보 중시가 강경책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결과적으로 안보가 증진되는 상태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국론이 모아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보수 세력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사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안보란 결국 대외적으로 가해오는 위협에 대해 스스로의 안전을 지킬 수 있는 상태를 일컫는 것이라면 군사·외교가 최일선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군사나 외교를 포함해서 안보의 최종적인 상태를 좌우하는 것은 국내 정치다. 국내 정치가 안정되고, 민주적으로 운영되며, 협치가 잘 되어야 결국 안보도 튼튼해지는 것이다. 이 너무나 상식적인 명제가 대한민국에서는 철저하게 부정되고 있다. 안보는 군사와 외교가 하는 일로만 치부되고 있다.

지금의 보수 세력은 2012년 대선 국면에서 북방한계선(NLL) 파문을 일으키고, 급기야 이듬해 10·4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을 공개하기에 이르렀다. 정쟁에 남북관계를 끌어들인 것이다. 당시 통일부 장관으로서 나는 극심한 자괴감에 빠졌다. 이는 남북관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어느 나라가 이런 상태를 보고 한국을 신뢰하겠나. 이는 안보태세를 위한 협치 구도를 앞장서서 깨버린 결과를 초래했다. 아무리 정치적 이익이 급해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그것을 보수 세력은 지키지 않았다.

이들은 헌법을 위반한 행위로 탄핵당한 대통령을 추종했던 세력이다. 지금도 그 대통령의 인기에 기대어 당내 개혁을 하지 못하고 있다. 전전 정권의 적폐를 일소하겠다는 현 정부에 맞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불러내어 과거사 싸움을 벌이려고 한다. 안보 상황이야 어찌 돌아가든 당리당략을 위해서라면 결과적으로 안보태세를 무너뜨리는 일도 할 수 있음을 과감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제 한국의 보수 세력은 안보 중시라는 브랜드를 그만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류길재(북한대학원대 교수·전 통일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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