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김재중] 폐기를 각오하고 당당하게 임하라 기사의 사진
2005년 9월 김현종 당시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이 해외 순방 중인 노무현 대통령에게 비행기 안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필요성을 보고하자 노 대통령은 “우리에게 필요하다면 추진해 보자”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협상을 주도하며 2007년 4월 마침내 한·미 FTA를 타결한 인물이 김 본부장이다. 그가 10년 만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미치광이 전략’에 밀려 한·미 FTA 개정협상 테이블에 앉게 되는 운명을 맞았다.

김 본부장이 지난 13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밝힌 한·미 FTA 공동위원회 2차 회의 결과를 보면 상황이 간단치 않아 보인다. 김 본부장은 “미국 (요구)안이 너무 심해 받아들일 수 없으면 (우리가 폐기)하는 거다”라고 말했다. 앞서 10일 민주당과의 비공개회의에서는 “한·미 FTA를 폐기할 수 있다는 트럼프 행정부에 맞서 한국 협상단도 협정이 파기되는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벼랑끝 전술’로 맞서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개정이냐, 폐기냐의 기로에 서 있는 형국이다. 미국이 우리나라의 해외 교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할 때 한·미 FTA를 유지하는 게 바람직하다. 하지만 한·미 FTA 안에는 불합리하고 폐쇄적인 조치가 산재해 있다. 체결 당시부터 불공평한 협정이라는 지적이 많았다. 따라서 얼마든지 개정할 수 있고 보완도 필요하다. 다만 전제가 있다. 개정 협상은 상호 호혜적이어야 하고 정확한 사실과 분석에 기초해야 한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폐기할 수 있다고 을러대는 식으로 상대에게 양보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이번 기회에 협정의 불공평하고 불합리한 점을 바로잡고 개방 수위를 높이는 방향으로 협상을 진행해야 한다. 한국 협상단이 수세적으로 협상할 경우 국내 여론이 악화돼 국회 동의를 받기도 어렵다. 협정이 폐기될 것을 각오하고 당당하게 협상에 임해야 하는 이유다. 김 본부장은 “한·미 FTA 개정협상이 깨지더라도 한국이 치명상을 입을 정도는 아니며, 미국이 손해 보는 것에 비해 우리는 극복 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자국의 ‘러스트 벨트(rust belt)’의 블루칼라를 의식해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듯 우리도 비판적인 국내 여론을 협상의 지렛대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아직 우리에게는 시간이 있다. 현재 진행 중인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나프타) 협상을 면밀하게 지켜보고 우리의 전략을 가다듬어야 한다. 미국은 나프타를 폐기하겠다는 협박으로 캐나다와 멕시코의 양보를 이끌어내려는 협상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이에 상대는 ‘나프타 폐기를 불사할 수 있다’(캐나다) ‘머리에 총구가 겨눠진 채 협상하지는 않을 것’(멕시코)이라며 맞서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나프타에서 투자자-국가분쟁소송(ISD) 제도 철폐를 주장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역으로 활용해 한·미 FTA의 독소조항으로 꼽히는 ISD 철폐를 미국에 제안할 수 있겠다. 또 한·미 FTA가 폐기되면 중국이 득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한·미동맹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미국에 설명하는 방안도 추진했으면 좋겠다.

개정 협상은 투명하게 진행돼야 한다. 우리의 패를 먼저 보여줘서는 안 되겠지만 어느 정도 협상이 진행된 시점에는 그간의 경과를 국민들에게 알리고 여론을 수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통상협상법은 제1조 및 제4조에 투명성과 정보공개를 규정하고 있다. 아울러 무역 협정은 기업 활동과 국민 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므로 당사자인 민간 기업과 관련 단체 및 협회 의견을 정부가 경청하고 협상에 적극 반영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미 FTA 협상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국익이 걸린 문제인 만큼 정파를 초월해 여야가 한목소리로 협상단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 우리 협상단이 서희 장군과 같은 담대함과 상대 의중을 꿰뚫는 혜안으로 협상을 잘 매듭짓기를 바란다.

김재중 산업부장 j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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