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김학수] 공론조사, 그 본질적 그늘 기사의 사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인간의 해방과 문명을 증폭시킨 것은 분명하다. 그 근저에는 개인의 존중과 합리적 선택결정론이 깔려 있다. 투표의 정치학과 구매의 경제학이 꽃핀 바탕이다. 그런데 늘 문제가 되는 것은 현명한 선택에 필요한 풍부한 정보의 존재 여부다. 공론조사, 즉 숙의(熟議) 여론조사는 그런 풍요로운 정보 제공을 통해 다수의 합리적인 선택결정을 얻으려는 노력이다.

마침내 공론조사를 통해 신고리 원전 5, 6호기 운명이 공사 재개로 결판났다. 그렇다면 우리는 참다운 숙의 민주주의를 성취했는가? 그 선택으로 국민은 행복하며 나라의 미래는 밝아지는가? 혹시 더 덧나는 일은 없는가? 시민이 보다 생산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아니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의 허점을 메울 길은 없는가? 새롭게 물어야 할 도전들이다. 공론조사의 최종 목표, 즉 공사 중단과 재개 중 선택은 기본적으로 시민참여단은 물론 우리 모두에게 이분법적 사고를 요구한다. 찬성과 반대 중 하나를 결심하는 것과 똑같은 구조다. 이것은 아이디어를 가장 극단적으로 단순화시키는 생각의 틀이다.

그래서 스테레오타입, 인종주의, 근본주의 등을 포함한 모든 편견은 이분법적 사고의 결과다. 이들은 필연적으로 양극화의 감정적 대립과 갈등으로 치닫게 만든다. 이번 공론조사 과정에서 시민참여단은 물론 전 국민이 그런 이분법적 대안을 따라 불신과 증오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고 봐야 한다.

이른바 ‘현명한’ 선택결정을 위해 유익한 많은 정보가 동원될 수 있다. 그 정보 하나하나에 각기 다른 무게의 가치를 두고 종합해서 내리는 선택이 소위 ‘합리적’ 선택결정이다. 소비행위 내지 투표행위 관련 모델처럼 사회과학에서 온갖 의사결정 모델이 범람하고 수학이 응용되기 시작한 단초다. 그런데 2002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대니얼 카너먼과 금년도 수상자 리처드 세일러는 대부분의 선택 상황에서 직관적으로 또는 아주 ‘제한적인’ 합리성을 갖고 우리가 결정을 내린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곧 숙의과정을 통해 얻어진 풍요로운 정보 대부분이 쓸모 있게 이용되기보다 어떤 두드러진 가치나 정보 하나가 선택을 결정짓는 것을 가리킨다. 결혼상대자를 고르고 주식을 살 때도 거의 그렇게 결정한다. 이번 공론조사에서도 정작 선택의 순간에는 공들인 노력과 비용에 비해 숙의의 무의미, 곧 수많은 정보의 낭비로 허탈감을 경험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이분법적 선택결정은 선거과정에서처럼 필연적으로 당파주의를 조장한다. 시민이 파트너십으로 뭉치기보다 파티전십(partisanship·당파심)으로 쪼개지는 것이다. 정치이론가 샹탈 무프가 말한 바처럼 민주주의가 모순인 것도 그것의 지향점이 통합이지만, 실제로는 적대적 당파싸움이 그것의 본질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결국 이분법적 선택결정에 목표를 둔 공론조사는 당파싸움의 첨예화에 더 기여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 선출 후처럼 공사 재개 선택 후에 갈등과 싸움이 더 격렬해지는 이유다.

사회학자 앨런 어윈은 과학기술 관련 정책, 예컨대 유전자변형 식품, 원전 건설 내지 원전 폐기물 저장소 선택 등의 이슈를 둘러싸고 유럽에서 시행된 26개의 숙의 공론화 사례를 연구한 바 있다. 분석 결과는 숙의 공론화가 일반 담론에서 격찬 받는 만큼 실제로는 뚜렷하게 생산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숙의의 커뮤니케이션 절차가 너무 멋대로인 점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일반시민이 참여하는 공론조사의 ‘짙은’ 그늘을 줄이는 길은 없는가? 그것은 곧 선택결정에 초점을 둔 민주주의의 허점을 메우는 길이기도 하다. 그에 대한 해답은 선택결정 ‘이전 과정’에 놓여 있다고 보인다. 즉 이미 ‘주어진’ 정책의 선택에 시민을 참여시키기보다 정책의 근원인 애초의 문제(이번 경우 ‘에너지 부족’)를 다각도로 진단하고 그것에 대한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즉 문제진단 및 정책디자인 과정에 시민을 참여시키는 방안이다. 그래야 시민의 다양한 아이디어가 생산적으로 쓰이고, 그 결과로 시민 통합이 가능해질 수 있다.

자고로 공동의 문제는 걱정으로 사람을 모으고, 해결방안은 찬반으로 사람을 헤어지게 하는 법이다. 문제에 대한 관여와 공감이 해결방안에 대한 선택 기회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이유다. 전자가 통합을, 후자가 분파를 불러오는 까닭이기도 하다. 따라서 전자가 성공하면 후자는 줄거나 양해될 수 있다. 이제 공론조사의 ‘그늘’을 깨달았으니, 앞으로는 문제진단과 정책디자인 단계에 시민이 참여하는 시민숙의를 생각해볼 때다.

김학수 DGIST 커뮤니케이션학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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