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정승훈] 전공의들에게 보내는 편지 기사의 사진
레지던트 H선생님을 처음 만난 건 다들 10일간의 추석연휴에 들떠있던 이달 초였죠. 가족의 수술을 앞둔 저녁에 선생님은 수술과 수혈 등에 대한 동의서를 받으러 왔습니다. 어려 보이는 얼굴에 체격도 자그마했죠. 첫인상 때문인지 간담도췌외과라는 무시무시한 과의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했습니다.

선생님은 조목조목 수술에 대해 말했습니다. 간이식을 제외하곤 가장 큰 수술이라며 각 장기의 절제 부위를 그림을 곁들여 설명했고 수술 중 사망 가능성, 수술 후 부작용 가능성에 대해서도 언급했습니다. 그런 뒤 사망 가능성은 수천 건 수술 중 단 두 번이고 부작용 확률도 극히 낮다며 안심시켰습니다. 기자의 버릇으로 관찰한 선생님의 언어 선택은 적절했습니다. 쉽지 않은 일일 터인데 단호한 어조 속에 환자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었습니다.

수술 후 매일이다시피 환자의 상태를 살피는 것도 선생님 몫이었지요. 수술 부위 상처를 살피고 배변 상태를 점검하는 건 물론 환자와 간병인의 짜증과 걱정, 호소를 듣는 것도 선생님이었습니다. 선생님이 환자의 상태를 점검하고 정리해놓으면 주치의 교수님이 오시곤 했습니다. 교수님 뒤에 서 있는 선생님의 모습을 힐끗 쳐다보니 신문사 수습기자들 같아 웃음이 나기도 했습니다.

입원환자 곁에서 지켜보니 병원은 군대만큼이나 철저한 계급사회더군요. 환자에겐 큰 차이 없는 의사들 사이에도 신분의 차이는 크게 느껴졌습니다. 간호사 선생님들이 의사 선생님을 부르는 호칭에서 그것을 확인했습니다. 간호사 선생님들은 교수는 ‘교수님’이라고 불렀지만 전공의는 ‘선생님’으로 불렀습니다. 다만 전공의 중에서도 인턴에겐 굳이 ‘인턴 선생님’이라고 호칭하더군요. 레지던트와 인턴의 차이는 간호사 선생님들의 호칭 속에서 아득히 멀어 보였습니다. 레지던트 ‘선생님’과 ‘교수님’의 차이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겠지요.

며칠 전 국정감사에서 끔찍한 사진을 봤습니다. 군사정권 시절 고문을 받은 이들의 모습으로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의과대학의 지도교수가 전공의들을 무려 2년간 폭행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수술 기구를 사용해 병원에서 폭행하고, 길거리에서도 무차별적으로 폭력을 휘둘렀다고 하더군요. 머리가 찢어지고 고막이 파열되는 일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폭력이 특정 교수나 특정 병원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인턴과 레지던트로 불리는 전공의들이 환자로부터, 지도교수와 상급 전공의로부터 일상적인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은 의료계의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교수가 지난달 펴낸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 따르면 인턴의 13.1%가 신체적 폭력을, 61.5%가 언어폭력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성 인턴의 27.5%는 성희롱 경험까지 있다고 하더군요. 김 교수는 ‘레지던트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라고 했습니다. 대한전공의협의회 소속 회원 1만156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라고 하니 믿을 수밖에 없겠지요.

의사로 일하는 지인들을 통해 전문의가 되는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는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국감을 통해 접한 사진은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그런 짓을 저지른 이들이 제대로 단죄되기를 기대합니다. 모든 전공의가 다시는 그런 폭력의 피해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며칠 지나면 어떤 이들은 ‘그래도 몇 년 고생하면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의사가 되니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매일 전공의의 위로와 처치를 목격하는 입장에선 생각이 다릅니다. 전공의들의 노력과 헌신이 부당한 폭력에 휘둘리지 않고 제대로 평가받아야만 환자들이 안전하게 진료 받을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밤에도 입원병동을, 응급실을 지키고 있을 H레지던트를 비롯한 전공의들에게 박수와 격려를 보냅니다.

s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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