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김영석]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 기사의 사진
1993년 6월 유엔 주재 미국대표부에서 진행된 제1차 북·미 고위급회담. 강석주 북한 외무성 부상과 로버트 갈루치 미 국무부 차관보가 대좌했다.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로 1차 북핵 위기가 고조된 때였다. 갈루치는 “사흘 이내 NPT 탈퇴를 취소하지 않으면 무력행사 카드를 배제하지 않겠다”고 했다. 강석주는 “그렇다면 사흘 뒤에 전쟁하자”고 받아쳤다. 이어 “개들이 짖어도 행렬은 간다”고 했다. 이후 북한 대표단의 단골 메뉴로 등장했다. 지난달 유엔 총회 참석차 뉴욕을 방문한 이용호 외무상도 인용했다.

이 구절은 아랍권에서 오래전부터 사용되었다고 한다. 고대 페르시아 격언이라는 말도 있다. 마거릿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39년 영화화되면서 세상 속으로 퍼졌다. 여자 주인공인 스칼렛 오하라가 우유부단함을 보이자 남자 주인공 레트 버틀러가 언급했다. 주위 눈치 보지 말고 소신껏 추진하라는 의미다.

우리나라 정치인들도 자주 인용했다. 행렬이 기차로 바뀌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 군 사조직인 ‘하나회’ 척결에 나섰다. 군부는 “무신의 난이 왜 일어난 줄 아는가”라며 반발했다. 김 전 대통령은 “개는 짖어도 기차는 달릴 수밖에 없다”고 일갈했다. 2012년 대선에선 문재인캠프가 새누리당 공격용으로 동원했다. 국민의당 박지원 의원도 애용자 중 한 명이다.

가장 즐겨 쓰는 이는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다. 경남지사 시절부터 전가의 보도로 활용했다. 어감이 좋지 않아 많은 비난을 받았다. 최근 다시 꺼내들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서청원·최경환 의원 자진 탈당 권고에 반발하는 친박계를 향해서다. 친박계는 홍 대표 사퇴 카드로 맞받았다. 볼썽사납다. 촛불집회가 시작된 지 1년이 다 됐지만 ‘박근혜’라는 주홍글씨 하나 지우지 못하고 있다. ‘탄핵 열차’에서 아직 내리지 못한 한심한 한국당이다. 이뿐 아니다. 환골탈태를 수차례 외쳤지만 변한 건 없다. ‘반대를 위한 반대’만 고집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문재인정부가 헛발질할 것이라는 헛된 믿음을 갖고서다. TK와 고령층 지지는 영원하다는 착각도 함께다. 정권 탈환은커녕 내년 6월 지방선거 승리조차 요원하다.

그래도 보수가 살아야 나라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다. 보수 세력이 기댈 수 있는 집을 마련하는 게 시급하다. 집은 곧 새로운 보수의 길을 담은 큰 그림이다. 목표는 5년 뒤 정권 탈환이다. 다음은 방향성이다. 이념 스펙트럼을 넓힌 유연한 보수여야 생존 가능하다. 최대 강점인 안보를 적극 활용하자. 진보 대통령과도 협치가 가능한 안보 이념의 새 틀을 짜자. 홍 대표가 귀국하면 접촉했던 미국 인사들의 의견을 문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하는 자리를 마련하면 어떨까.

그리고 민생이다. 철저하게 서민 속으로 가야 한다. 가진 자 위주의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부자가 아닌 서민 감세를,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 우선 정책을 앞세워야 한다. 젊은 세대 속으로 걸어가자. 진보 의식이 50대까지 급속히 확산되는 상황에서 60대 이상만 바라봐선 승산이 없다.

혁신이다. 보수정당 통합 이벤트로 보수층을 결집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몸집만 키워 문재인정부에 맞서겠다는 어리석은 발상이다. 한국당을 제로베이스에서 바꿔야 한다. 먼저 기득권을 포기하는 결단이 출발점이 돼야 한다. 한국당 내부의 적폐 요인들을 과감히 도려내는 읍참마속이 필요하다. 그 자리에 젊은 인재들을 대거 수혈해 채워야 한다. 필요하면 홍 대표 자신도 물러날 수 있다는 각오여야 한다. 어떤 저항에도 굴하지 말고 혁신 기차가 5년 동안 종착역을 향해 쉼 없이 달려야만 가능하다.

끝으로 박 전 대통령에게 바란다. 정치 지도자의 책임은 무한하다. “역사적 멍에와 책임을 지고 가겠다”고 했다. 보수의 미래를 위해 희생의 행동에 나서야 한다. 마지막 정치 무대여야 한다. 2007년 ‘아름다운 경선 패배 선언’을 다시 보고 싶다.

김영석 논설위원 yskim@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