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손병호] 사드에 쫓겨난 종업원들 기사의 사진
서울 마포구 광흥창역 근처에 규모가 꽤 큰 김 판매장이 있었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있었다. 간판만 있었다. 그런데 지난주 간판마저 내려졌다. 대신 헬스장이 들어선다는 현수막이 나붙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김 판매장 앞에는 관광버스가 줄을 지어 있었다. 버스에선 중국인 관광객(유커)이 쏟아져 나왔다. 동네 사람들은 관광버스 여러 대가 차로를 막고 있어도, 유커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도 싫은 표정 하나 없이 늘 상냥하게 대했다.

김 판매장 옆 치킨집과 커피전문점도 들락거리는 유커 덕분에 매출이 뛰었다. 주변이 활기찬 작은 시장 같았다. 그랬던 게 지금은 을씨년스럽게 변해 있다. 김 판매장은 봄이 지나 문을 닫았다. 중국의 사드 보복 때문이다. 그래도 얼마 있다가 끝나겠다 싶었던지 재오픈을 기다리며 간판을 그대로 달아놓았다. 그러나 임대료를 견디지 못해 결국 폐점됐다. 옆의 커피전문점이 밖에 내놓았던 중국어로 된 이동식 메뉴 소개 간판도 치워졌다. 김 판매장 종업원들은 어디로 갔을까. 서울 명동과 제주도의 유커를 맞던 식당과 상점, 또 각지 면세점에서 쫓겨난 종업원들은 어디로 흩어졌을까. 청와대와 외교부가 31일에 사드 보복이 16개월 만에 끝났다고 발표할 때 그 종업원들은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중국 외교관들은 14억 인구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 것을 가장 큰 자랑거리로 내세운다. 그 많은 인구를 굶기지 않은 걸 ‘기적’이라고 표현한다. 그들은 또 북한에 대한 제재를 더 세게 하지 못하는 이유로 죄 없는 북한 주민들이 피해를 본다는 점을 내세운다. 그런데 사드 보복은 우리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를 건드린 것이다. 정치 문제로 이웃나라의 밥줄을 쥐고 흔든 사안이다. 사드로 위협받는 중국의 안보는 목숨이 걸린 문제라고 주장하지만, 임박성이나 실제 위협의 정도를 따지면 엄살일 뿐이다. 그 정도 일로 이렇게 오랫동안, 광범위하게 보복하는 건 대국의 도리가 아니다.

사드 합의 이후 한국이나 중국 정부가 “앞으로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것”이라고 앞 다퉈 예고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오는 10∼11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서 만나 화기애애한 모습을 연출하고, 또 연내 문 대통령 방중이나 시 주석의 내년 평창 동계올림픽 참석 같은 뉴스가 쏟아질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드로 생긴 상처를 조기 봉합하려 할 것이다. 그런데 상처가 봉합된다고 기억까지 지울 수 있을까. 게다가 가장 많이 상처를 받은 건 가장 힘없는 사람들인데.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시 주한 외교사절단을 초청한 자리에서 “전쟁을 결정하는 것은 정치하는 사람들이고, 전쟁을 하느냐 마느냐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외교관들이며, 막상 전쟁이 나면 죽는 것은 군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말 그대로 양국 지도자들과 외교안보 라인이 ‘사드 전쟁’을 막지 못했고, 너무 오래 끌었으며, 그 결과 생계 문제가 달려 있던 애꿎은 종업원들과 상인들만 희생됐다.

양국 정부는 사드 문제 해빙 과정에서 더욱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한다. 우리 정부가 앞장서서 유커 돌아온다고 호들갑만 떨 일은 아니다. 문 대통령도 시 주석을 만나면 상처받은 우리 국민을 염두에 두고 발언이나 표정관리에 신경써야 한다. 시 주석과 중국 정부도 한국인의 상처에 대한 ‘기억’을 염두에 둬야 한다. 제대로 치유되지 않으면 이 기억은 10년 이상 갈 것이고, 어쩌면 ‘잊지 못할 역사’로 기록될 수도 있다.

일본군 위안부 합의가 ‘돈의 합의’가 아니듯 사드 합의도 ‘유커 컴백 합의’에 방점이 찍혀선 안 된다. 사드 합의 역시 피해자들의 고통을 기억하고, 진심어린 위로가 없는 한 ‘그들만의 합의’에 머물 것이다. 앞으로 양국 관계자들이 ‘비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지듯’이라는 말을 셀 수도 없이 많이 할 것이다. 그런데 설 땅조차 없어진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손병호 국제부장 bhs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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