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라동철] 성폭력과 젠더 감수성 기사의 사진
최근 언론보도 등을 통해 몇몇 기업과 기관들에서 발생한 사례가 알려지면서 직장 내 성폭력 문제가 다시 도마에 올랐다. 사실관계를 다투는 경우도 있지만 거론된 기업이나 기관들은 이미지를 잔뜩 구겼다. 비난이 쏟아지거나 불매운동의 대상이 됐고 가해자에 대해서는 형사처벌 절차가 진행 중이다.

정부가 여러 차례 대책을 내놓았고 자성의 목소리도 흘러나왔지만 직장 내 성폭력은 끊이지 않는다. 국민의당 김삼화 의원이 지난달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아 내놓은 자료를 보면 최근 5년간 직장 내 성폭력범죄 발생 건수는 5816건이나 된다. 매년 1000건 이상이며 늘어나는 추세다. 피해자가 알려지는 걸 꺼려 신고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폭행, 성추행, 성희롱을 포괄하는 성폭력범죄는 공공기관, 학교, 민간기업 등 직장을 가리지 않는다. 성폭력이 이처럼 만연한 건 남성 중심의 직장문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피해자가 남성인 경우도 간혹 있지만 대부분은 남성 상사나 동료들이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부하나 동료 여성을 성적으로 괴롭히는 경우다.

성폭력 사건이 불거지면 가해자들은 일단 잡아떼거나 이렇게 항변한다. “성추행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쪽에서도 원한 거 아니었어?” “그땐 좋아하더니 왜 이제 와서 딴소리야?” “별것 아닌 일로 왜 문제를 키우지?” 주변에서도 가해자에게 감정이입해 양비론 입장에 서거나 신고의 순수성을 의심하기도 한다. 성범죄는 가해자는 물론 피해자에게도 비난이 쏟아지는 거의 유일한 범죄다. 그렇다보니 피해자들은 신분 노출, 직장 내 따돌림 등 2차 피해를 우려해 신고를 주저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포옹이 애정의 표현이 되지만 상대방 의사를 무시한 포옹은 성폭력이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 신체적 접촉이나 성적 농담은 어느 상황에서도 해서는 안 된다. 잘 대해주는 걸 성적 호감을 표시한 것으로 착각하는 남성들이 더러 있다. 상대의 반응을 멋대로 해석해 오버하다가는 한순간에 많은 걸 잃게 될 수 있다.

직장 내 성폭력 건은 앞으로 더 많이 불거질 개연성이 높다. 적극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고 나서는 여성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성폭력을 예방하려면 남녀 간 권력관계의 불균형에서 비롯된 남성 중심의 왜곡된 성문화를 바꿔야 한다. 성교육을 통해 젠더(gender) 감수성을 키워야 한다. 젠더는 사회적인 성을 일컫는 개념이다. 생물학적 성(sex)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성 정체성을 말한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이성에 대해 공감하고 감정과 의사를 존중하는 게 젠더 감수성이다.

대부분의 직장에 성교육이 의무화돼 있지만 형식적으로 진행하거나 그마저 제대도 이행하지 않는 곳이 많다. 체계적이고 꾸준한 성교육을 통해 젠더 감수성을 끌어올려야 한다. 성 인식이 형성되는 시기인 초등학교에서의 성교육을 강화하는 게 그래서 중요하다.

성폭력에 대한 처벌도 강화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음주 후 성범죄에 대해 심신미약 상태라는 이유로 관대하게 처벌하는 제도는 재검토해야 한다. 자발적으로 술을 마신 후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는 형을 감경해주지 않는 국가도 많다. 성추행이나 성희롱 등의 발생 가능성을 높이는 폭음 위주의 회식문화는 마땅히 개선해야 한다.

1990년대 초만 해도 음주운전이나 안전띠 미착용은 다반사였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누구나 해서는 안 될 행동으로 인식하고 있고 위반 행위도 줄었다. 캠페인 등을 통해 동참을 유도한 것도 효과가 있었겠지만 위반하면 불이익을 받게 된다는 인식이 확고히 뿌리내린 결과다. 성폭력범죄도 시간은 걸리겠지만 지속적인 성교육과 엄정한 처벌을 통해 줄여나갈 수 있지 않을까. 여성들은 누군가의 딸이고, 동생이고, 아내다. 그런 점에서 성폭력은 내 가족의 문제이기도 하다. 젠더 감수성을 키우는 걸 주저할 이유가 없다.

라동철 논설위원 rdchu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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