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김재중] 산업정책이 안 보인다 기사의 사진
기억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7년 11월 21일 우리나라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로 결정하면서 온 나라가 부도와 실직, 파산으로 아우성이었다. 은행이 문을 닫고 거리엔 노숙자가 넘쳐났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2017년 11월 우리 경제는 외형적으로 많이 커졌고 외환보유액도 크게 늘었다. 반도체 호황에 힘입어 수출은 최고 기록을 거듭 경신하고 있다. 무디스 등 세계 3대 신용평가 기관은 우리나라의 국가 신용등급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일각에선 큰 위기가 다시 올 수 있다고 우려한다. 위기론이 기우(杞憂)일 수도 있겠으나 우리 경제가 외화내빈(外華內貧)으로 체질이 약해졌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외환위기 때는 응급조치가 필요한 급성 폐렴 환자였다면 지금은 겉으로는 증상이 드러나지 않는 만성질환자가 돼 있다는 얘기다.

10대 주력 산업부터 살펴보자. 중국의 매서운 추격으로 조선, 자동차, 철강, 디스플레이 등은 바짝 쫓기는 형국이고 반도체 정도만 겨우 기술 격차로 우위를 점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차세대 기술 개발 등을 적극 지원해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국내 업체 간 중복 투자를 지양하는 등 산업 구조조정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업계 사람들을 만나보면 정부의 산업 정책이 에너지 정책 말고는 없는 것 같다고 한다.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산업 현장을 열심히 돌아다니며 의견을 청취하고 있으나 미래 비전을 보여주는 산업 정책이 보이지 않는다. 특히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한 범정부 차원의 산업 전략이 절실하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 16일 정부에 전달한 ‘최근 경제 현안에 대한 전문가 제언’에 따르면 아마존, 구글, 페이스북 등 젊은 IT 기업의 등장으로 미국 10대 기업(시가총액 기준)의 평균 나이는 지난 10년간 14살 더 젊어졌다. 반면 전자, 자동차, 석유화학 등 기존 산업에 정체된 한국 10대 기업의 평균 나이는 같은 기간 15살 노쇠해졌다. 맥킨지는 혁신을 막아선 ‘규제 환경’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맥킨지는 “세계 100대 사업 모델이 한국에서 창업했다면 절반 이상이 제대로 꽃피울 수 없거나 시작조차 할 수 없었다”고 분석했다.

스타트업을 육성해 제2의 벤처 붐을 일으키려면 혁신이 수용될 수 있는 개방형 규제 체제로 바뀌어야 한다. 정부가 신산업에 도입하겠다고 밝힌 ‘규제 샌드박스’를 조속히 시행해야 한다. 서비스산업에도 새로운 기회가 있다. 사석에서 만난 박병원 한국경영자총협회장은 “왜 우리나라에는 ‘알리바바’와 같은 기업이 없을까”라며 서비스산업 진흥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IT 인프라도 뛰어나고 아이디어도 좋은데 결국 규제가 문제다. 한 외국인 투자 기업은 “한국은 서비스산업 하기 좋은 곳이다. 의술이 뛰어나고 교육열이 높은 한국이 의료·교육의 아시아 허브로 자리잡기 딱인데 그 시장을 아직 못 먹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노동 부문의 선진화도 절실하다. 통상임금, 최저임금, 근로시간 단축 등 각종 노동 현안에서 대기업 강성노조 위주의 양대 노총이 근로자들을 대변한다고 하지만 노동 개혁에 걸림돌로 작용해 일자리가 줄고 대·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와 정규직·비정규직 간 차별이 심화되고 있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도 “한국의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성장잠재력을 낮출 뿐만 아니라 사회 통합을 저해하고 역동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산업구조 변화에 맞춰 유연하게 노동시장 개혁을 추진하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사회 안전망을 강화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IMF 체제 하에서 금 모으기 등 국민의 단결로 위기를 빠르게 극복한 저력이 있다. 정부와 기업, 노조 등 경제주체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사회적 합의를 이뤄낸다면 풀어내지 못할 문제가 없다. 다시 신발끈을 동여매고 전진해야 할 때다.

김재중 산업부장 j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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