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유성열] 천천히 또 느리게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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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으로 찾은 하와이. 현지 공항에 내려 밖으로 나서는 순간 화사한 햇살이 우리를 반겼다. 상상만 하던 지상낙원의 풍광을 정신없이 느끼기를 한참, 도심으로 이동하고 나서야 주변을 자세하게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무엇인가 달랐다. 신혼여행이라서, 유명한 관광지여서가 아니라 비현실적인 이질감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예상보다 사람들이 많고 붐볐다. 성수기가 아니었는데도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거리에 가득했다. 당연히 도로에 차도 많았다. 서울시내 못지않다고 생각될 만큼 막히는 구간도 있었다. 하지만 조용했다. 들리는 소리는 주로 사람들의 대화 소리였다. 복잡한 도시에서 타인의 목소리가 잘 들린다는 것 자체가 매우 생소했다. 간혹 차도로부터 들리는 소리는 낮게 깔리는 엔진소리 정도였다. 그제야 이질감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차량 경적이 들리지 않았다. 여행 가이드에 따르면 하와이에서 가장 복잡하다는 호놀룰루에서도 운전자들이 경적을 거의 울리지 않는다. 그만큼 사람들이 여유가 넘친다는 얘기다. 우스갯소리로 경적소리가 들린다면 십중팔구 한국 관광객이 운전하는 차일 것이라고도 했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 가만히 차도 쪽으로 청각을 집중해봤다. 경적이 수초가 멀다하고 들렸다. 경차부터 대형차까지 그 높낮이와 음량도 다양했다. 이전에는 체감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오히려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던 게 분명하다. 그렇게들 바쁠까.

관광객이 많은 평화로운 휴양지와 한 나라의 정치·경제·사회의 중심지인 거대도시를 단순 비교하기에는 물론 무리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울은 정도가 심하다. 뉴욕 런던 등 외국 대도시를 가봐도 우리는 유독 극성이다.

당장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었을 때 앞 차가 이를 파악하지 못하고 멈춰 있다면 바로 경적을 울리는 운전자가 대부분이다. 끼어들기를 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운전자 입장에서는 경적이 다양한 상황에서 일종의 의사표시라고 여기는 듯하다. 한 대, 두 대 경적소리가 모여 행인들의 고막을 때리는 커다란 소음이 된다는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다. 막상 생각해보면 그리 긴박한 상황도 많지 않다. 차도에 어린이가 급작스레 뛰어들어 경고가 불가피했을까, 아니면 일분일초라도 늦으면 큰 문제가 생길 일을 앞두고 있을까.

도로교통법 제49조 ‘운전자는 정당한 사유 없이 반복적이거나 연속적으로 경음기를 울리는 행위를 하여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소음을 발생시키지 아니할 것’을 위반하는 경우도 많다. 실제 직진하려는 앞차가 비켜주지 않아 우회전할 수 없다는 이유로 30초 넘게 계속 경적을 울린 운전자가 최근 유죄를 선고받기도 했다.

마음속에 여유가 너무나도 없다. 그 자리는 답답함이 가득 채워져 있다. 하다못해 신호가 빨간색으로 바뀌어 내 차가 멈춰서는 것조차 갑갑하다. 운전자뿐만이 아니다. 보행자들은 저 멀리 횡단보도 신호가 초록색이 되면 수십m 뒤에서부터 뛰기 시작한다. 이번 신호를 보내고 다음에 건넌다 해도 큰일 날 사람이 얼마나 될까. 길어야 5분의 시간이다. 횡단보도 한복판에서 신호가 다시 바뀌어 사고가 나는 경우도 잦다.

버스 안에서는 또 어떤가. 좌석을 차지하기 위해 먼저 탑승을 기다리던 사람을 제치는 것까지는 이해가 어렵지 않다. 그만큼 앉아서 가는 건 편하다. 문제는 내릴 때다. 버스가 정차하지 않았는데도 자리에서 서둘러 비틀거리며 일어난다. 넘어지거나 다른 사람과 부딪히는 등 아찔한 순간도 많다. 나를 내려주지 않고 버스가 떠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는 걸까.

지하철이 역에 멈출 때는 사람들이 뒤엉킨다. 탑승객이 다 내리지도 않았는데 일단 타고 본다. 내리는 자와 타는 자의 어깨가 부딪힌다. 어차피 지하철은 사람이 다 타야 출발한다. 나 하나 조금 빨리 탄다고 먼저 출발하지 않는다.

산업화 시대를 거치며 가난은 벗어났다. 빈부 상태도 수십년 전보다는 개선됐다. 국민 모두가 ‘빨리빨리’ 살아온 결과다.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다. 삶의 여유가 행복의 중요 조건으로 떠올랐다. 아무리 먹고 살 만해졌다고 해도 마음에 여유가 없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조급함을 안고 산다면 쫓기며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일종의 훈장처럼 여겨졌던 국민적 습성이 단시간에 바뀌기는 어렵다. 다만 조금만 천천히 갔으면 한다. 그래도 괜찮다. 한 템포 느려질 때 대개는 얻는 것이 더 많아지는 요즘이다.

글=유성열 산업부 기자 nukuva@kmib.co.kr, 삽화=전진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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