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 적폐를 넘어]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 환자보다 더 아픈 그들 기사의 사진
갑질로 고통 받는 감정노동자

“옷 벗고 싶냐” “윗사람 바꿔’
“내가 낸 세금으로 밥 먹는데”
불이익 예상돼 적극 대응 못해
‘음성·온라인’ 노동자도 해당

임금노동자 31∼41%인
560만∼740만명 해당 추정
대형마트·백화점·면세점 등
40% “폭행당한 경험 있다”


역무원 A씨는 지난달 26일 오후 11시30분쯤 서울 지하철2호선 홍대입구 역사 내에서 봉변을 당했다. 술에 취한 20대 남성은 “이쪽으로 가세요”라고 안내한 그의 멱살을 잡았다. “X나게 싸가지 없네. 옷 벗고 싶냐”는 막말과 함께 욕설을 퍼부었다. 다른 직원이 출동했지만 욕설은 계속됐다. 승객은 20분 후 출동한 경찰에 연행됐지만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청년의 어머니가 이튿날 역무실을 찾아 “별것도 아닌데 신고까지 했느냐”며 역무원들을 다그쳤다.

7일 서울지하철노동조합 등에 따르면 지난달까지 지하철 1∼4호선에서 일어난 역무원 대상 폭행사건은 105건이다.

서울지하철노조 관계자는 “모든 직원이 폭언·폭행을 1년에 수차례씩 경험한다”며 “일상적으로 위험에 노출돼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국민연금공단에 다니는 B씨는 지난 5월 4일 고객으로부터 위협을 받았다. 고객은 노후긴급자금 대부를 요청하다가 고성을 내지르며 폭언하기 시작했다. 소란은 30분 동안 지속됐다. 업무 담당자 등이 제지했지만 소용없었다. 고객은 손으로 인턴 직원의 머리를 가격하기도 했다. 지사장이 나와 면담한 뒤에야 그를 귀가시킬 수 있었다.

택배기사 C씨는 부재중인 고객 집에 배송하다 황당한 문자를 받았다. 물품 분실을 방지하기 위해 창고에 택배물을 둔 뒤 문자를 보내자 고객은 집 앞에 둬 달라고 요청했다. 서둘러 택배물을 옮긴 뒤 고객에게 문자를 보냈다. 하지만 답장에는 ‘고맙다’는 말 대신 ‘잘했어. 치타’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이들은 감정노동자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고객을 응대하는 노동자다. 자신의 감정이 말투나 표정, 몸짓에 나타나지 않도록 연기하는 것까지 직무의 일부로 포함된다는 뜻이다.

고객, 승객, 환자 등을 직접 대면하거나 음성·온라인을 통해 간접 상대하는 노동자들이 해당한다. 대부분 시민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다. 현재 전체 임금노동자의 31∼41%인 560만∼740만명이 감정노동자로 추정된다.

이들은 폭행·폭언·성희롱 등 ‘생활 속 갑질’에 심각하게 노출돼 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지난 7∼8월 대형마트·백화점·면세점 등에서 일하는 노동자 2895명을 대상으로 실태 조사한 결과 10명 중 4명이 고객에게 폭행당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폭언과 괴롭힘을 당했다는 답도 각각 12.2%와 6.7%로 나타났다. 성희롱 피해자도 3.6%나 됐다.

국민연금노조 관계자는 “‘윗사람 바꿔’ ‘우리가 낸 세금으로 너희들 밥 먹는데…’ 등 인신공격성 발언이나 욕설을 듣는 것은 드물지 않은 일”이라며 “이 같은 폭력이 언제 발생할지 모른다는 게 늘 두렵다”고 했다.

적극적 대응도 쉽지 않다. 택배노조 관계자는 “기분이 나쁘다고 따졌다가는 어떤 불이익을 받을지 알 수 없다”며 “그냥 참는 방법밖에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한 역무원은 “때리면 피하거나 도망가는 게 최선 아니겠느냐”고 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자연스레 정신적 스트레스가 쌓일 수밖에 없다. 윤진하 연세대 의대 직업환경의학과 교수팀에 따르면 높은 수준의 감정노동을 요구받는 노동자가 느끼는 자살 충동은 그렇지 않은 노동자에 비해 2배 높다.

일부는 참다못해 심리상담소를 찾는다. 지난 5월 시작된 서울시 ‘감정노동자를 위한 심리상담센터’에서는 지난 10월까지 500회가 넘는 상담이 진행됐다.

서울시는 5곳에서 심리상담과 치유프로그램, 법률 서비스 등을 제공하고 있다. 유금분 서울노동권익센터 심리상담실장은 “직군은 다르지만 폭언이나 인격모독성 발언을 듣고 상담을 신청하는 경우가 많다”며 “심한 경우 대인 기피 증세를 보이거나 특별한 이유 없이 몸이 이곳저곳 아프다고 말할 때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감정노동자를 위한 법안은 미비하다. 19대 국회 때 감정노동자 보호와 관련된 법안 16개가 발의됐으나 은행 등에서 고객을 응대하는 노동자를 보호하는 법안만 통과됐다. 노동·인권 단체들은 감정노동자를 보호할 수 있는 추가 입법이 시급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글=허경구 기자 nine@kmib.co.kr, 그래픽=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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