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코메티’ 결코 걷지 않고도 가장 멀리 가는 사람 기사의 사진
국민일보가 프랑스 파리 알베르토 자코메티 재단과 공동 주최하는 ‘알베르토 자코메티 한국특별전’이 오는 21일부터 내년 4월 15일까지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개최된다. 자코메티의 대규모 회고전은 국내 처음으로 걸작 ‘걸어가는 사람’ 석고 원본 등을 볼 수 있다. (1)‘가리키는 남자’ (2)‘캐롤린 초상화’ (3)‘아네트 흉상 (4)‘야나이하라 흉상’. 이 중 ‘가리키는 남자’는 기고에는 언급되지만 이번 전시에는 오지 않는다. 자코메티 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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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토 자코메티(1901∼1966)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2014년 11월 오스트리아 빈 레오폴트미술관에서였다. 당시 에곤 실레(1890∼1918)에 대한 글을 쓰고 있던 나는 세계 최고의 실레미술관이라고 하는 레오폴트미술관에 들렀다가 마침 이 미술관에서 개최한 자코메티의 특별전까지 관람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온종일 실레와 자코메티의 작품 속에 빠져 있던 나는 그날 밤 실레의 생가가 있는 툴른을 향해 떠났는데, 어두운 창밖을 보며 이 두 작가의 유사성이 마음에 들어왔다. 그것은 실레와 자코메티는 같은 시대, 같은 나라의 작가들이 아니었음에도 예술을 향한 어떤 고집 때문에 지독한 고통을 통과하지 않으면 작품을 만들지 못하는 습성이 있었고, 그 결과 이들의 작품(회화 조각 드로잉)에는 바짝 마르고 앙상한 인간들만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날 내가 본 자코메티의 조각 중 특히 기억되는 작품은 그때까지의 예술 경매가 최고 액수를 기록했던 ‘걸어가는 사람Ⅰ’(1960년 작, 2010년 2월 런던 소더비경매에서 1억416만 달러에 거래됨)의 원본이랄 수 있는 ‘걸어가는 사람’(1947년 작)이다.

1947년은 자코메티 예술의 전환기를 연 중요한 해다. 이 해에 자코메티 예술의 원숙미를 드러낸 실물 크기인 ‘걸어가는 사람’ ‘가리키는 남자’(2015년 5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4130만 달러로 경매 사상 최고 조각품이라는 기록을 세움) ‘여인상들’(키 크고 날씬한 여인상들) 등 기념비적인 작품들이 나왔다.

‘걸어가는 사람’은 ‘걸어가는 사람Ⅰ’에 비해 상체를 곧추세운 형태다. 어디론가 걸어갈 준비를 마친 것처럼 보이는 작품이다. 다음 해 만든 ‘빗속을 걸어가는 남자’는 훨씬 보폭이 크고 상체를 기울여 서둘러 걷고 있다. 1960년에 나온 ‘걸어가는 남자Ⅰ’은 이 두 작품의 중간쯤 되는 보폭과 상체의 기울기를 보이고 있다 그 자세는 움직이려는 힘과 내면의 표정까지 보여주는데, 자코메티의 걸어가는 남자들 조각은 부상당한 자신의 발에 대한 미학적 메타포로 보인다. 피라미드 광장을 걸어가던 서른일곱의 자코메티는 술 취한 미국 여인의 음주운전으로 다리를 다쳤다. 수술 후 의사로부터 평생 절룩거리거나 지팡이에 의지해야 할 처지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그는 오히려 기뻐했다고 한다.

자코메티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몇 사람이 있다. 평생 동안 모델이 되어준 동생 디에고 자코메티, 26세 나이에 48세의 자코메티와 결혼한 아네트 암, ‘도둑 일기’의 프랑스 작가 장 주네(1910∼1986), 자코메티보다 열일곱 살 어린 일본인 철학교수 야나이하라 이사쿠, 매춘부 캐롤린 등을 꼽아야 할 것이다.

1951년에 도쿄대학 총장을 지낸 야나이하라 다다오(‘성서강의’의 저자)의 아들로 알베르 카뮈 ‘이방인’을 일본어로 번역한 철학자 야나이하라 이사쿠는 1955년 가을 프랑스에서 자코메티와 만난다. 36세의 철학자였던 야나이하라는 다음 해 봄이 오자 이집트에 들러 일본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그때 자코메티는 야나이하라에게 자신의 모델이 되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자코메티로부터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1605∼1665)가 궁정화가 벨라스케스의 모델이 되어준 것 말고는 인류의 발전에 기여한 바가 없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던 야나이하라는 자코메티를 떠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집트 방문을 연기하고 포즈를 잡기 시작했다. 자코메티의 처음 계획은 일주일 정도 모델을 스케치한 후 일본으로 보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야나이하라의 귀국은 자꾸만 늦춰졌고 일본에서는 계속 연락이 왔다. 밤새도록 같은 표정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내면의 깊이를 좋아했던 자코메티와 천년 동안이라도 모델을 설 자신이 있었던 오사카대 철학과 교수는 서로 친밀해져 열정적인 집착의 국면에 접어들었다. 자코메티의 전기를 쓴 미국인 제임스 로드의 ‘자코메티, 영혼을 빚어낸 손길’(을유문화사)에 따르면 어느 날 저녁 자코메티는 그림을 그릴 계획이 없다고 말했고, 자코메티의 아내 아네트는 남편의 일본인 친구와 콘서트에 다녀오던 길에 그를 호텔로 유혹해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 날 순진하고 진실하고 싶었던 야나이하라는 자코메티에게 “화가 났느냐”고 물었고 자코메티는 “매우 기쁘다”고 답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날 저녁 작업이 끝난 후 자코메티는 볼 일이 있다면서 부인과 모델을 남겨놓고 떠났고, 아네트는 모델에게 호텔로 갈 것을 제안했다.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그랬다. 자코메티는 이 둘의 관계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지 못한다면 더 어색할 것이다. 나는 매우 기쁘다”고 공언했다. 아네트는 어떤 죄책감도 없이 두 남자를 동시에 사랑할 수 있는 여자였다. 일본에서의 계속된 연락으로 인해 철학교수는 12월 중순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자코메티 부부로부터 다음 해 여름방학에 다시 파리로 돌아올 것을 요청받았다. 비행기 요금과 생활비 일체를 제공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렇게 몇 년간 이 기이한 우정이 계속되는 사이 아네트는 자코메티에게 진절머리를 냈고, 58세의 자코메티는 21세의 매춘부 캐롤린에게 빠져들었다. 자코메티는 아네트에게 멋진 옷을 사주지 않고, 오히려 더 본질적이라며 삭발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캐롤린에게는 수백만 프랑의 다이아몬드 팔찌와 진주목걸이와 승용차를 선물했다. 포주들에게 돈을 뜯기면서도 자코메티는 캐롤린에게는 그만큼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믿었다.

이 특이한 관계가 지속되는 동안 자코메티의 예술은 정점을 찍었다. 스위스 출신의 자코메티가 선택한 나라 프랑스에서는 그를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았지만 해외에서는 딴판이었다. 1955년에 세 나라에서 자코메티의 기념비적인 전시회가 열렸다.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런던 대영제국 예술평의회 갤러리, 독일 세 도시의 미술관 전시회. 그리고 베니스 비엔날레 집행위로부터는 다음 해 6월에 열리는 비엔날레의 프랑스 전시관에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품을 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초대받지 않았더라면 더 기뻤을 것이라며 한 나라를 대표하지는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는 비엔날레의 수상자 후보가 되는 것도 정중히 거절했다. 이 비엔날레에 출품한 작품이 10개의 형상으로 이루어진 ‘베네치아의 여인들’인데, 한국 조각가 유영호의 ‘그리팅 맨(인사하는 남자)’처럼 양팔을 겨드랑이에 바짝 붙이고 서 있는 여성들의 가느다란 작품을 선보였다.

장 주네는 1954∼57년 자코메티의 모델을 한 작가다. 피카소가 자신이 읽은 예술가에 관한 최고의 책이라고 평가한 장 주네의 글 ‘자코메티의 아틀리에’(열화당)는 한 예술가의 창조성이 다른 사람의 창작의 재료가 된, 예술에서 드문 사례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평자들은 자코메티의 예술이 20세기의 불안과 실존적 고독을 표현한 것이라고 했지만, 주네의 평은 누구의 평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절박한 자코메티의 가슴을 열어 보여준다. “자코메티의 작품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 세상이 더욱 더 견딜 수 없어지는데, 그것은 이 예술가가 거짓된 외양이 벗겨진 후 인간에게 남는 것을 찾아내기 위해 자기의 시선을 방해하는 것을 치워 버릴 줄 알기 때문인 것 같다.”

자코메티가 오늘날과 같이 세계 미술사의 거장으로 우뚝 선 데에는 그의 특별한 개성을 빼놓을 수 없다. 자코메티의 서 있는 인물상은 전부 발이 비밀에 싸여 있다. 받침대 위에서 막 걸을 채비를 하고 있는 그의 발들은 뭉쳐져 있는 진흙 속에서 발을 빼내는 듯, 아니면 구름 속에서 나온 듯 신비함으로 싸여 있다. 그의 발은 어느 작품도 팔(八)자형이라고 하는 외측 방향으로 열려 있지 않다. 장 주네는 “그처럼 전설적인 내반족(발이 안쪽으로 휘는 형)에 사로잡힌 마력은 일반적인 생각이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지점이 자코메티의 장인정신을 모두 찬미하기는 하지만 이유가 정반대로 나뉘는 부분이라고 본다. 그는 머리 어깨 팔 골반으로 우리를 깨우치고, 발로는 우리를 매혹시킨다”고 썼다.

얼핏 보면 자코메티의 삶은 일본인 친구와 아내 아네트, 거리의 여자 캐롤린이 뒤죽박죽 얽혀 있어 무척 무질서해 보이지만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시기에 최고의 작품들이 나왔다는 사실이다. 자코메티의 경우를 보거나 그에게 영향력이 지대했던 다른 예술가들-사르트르, 피카소, 장 주네, 사뮈엘 베케트-의 예를 보면 예술가들의 성취력(예술성)은 현실의 일상적 무게로부터 얼마나 많이 벗어나 있는가 하는 점과 그 벗어난 행동들이 모두 발가벗겨지더라도 그것으로부터도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물론 거기에는 엄청난 고통이 수반된다. 그러나 그들의 예술성은 그 고통을 자양분으로 피어난다.

부스스하게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주름진 얼굴, 허약하고 골격만 있는 청동 쪼가리들. 그래서 섬뜩하고 불쌍하게 보이는 인간들. 그의 조각품은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좌대위에 고정돼 있다. 그럼에도 사르트르는 “아무도 (자코메티의 조각보다) 더 멀리 갈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불일치는 무엇인가. 한 발자국도 가지 않은 것과 누구보다도 멀리 걸어간 거리, 자코메티는 그 절대적인 거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역동성을 각자가 판단하도록 관객에게 넘긴다.

<소설가·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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