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고승욱] 전쟁, 두렵지만… 기사의 사진
1·4후퇴 때 보리밥을 머리에 이고 피난길에 올랐던 팔순 노모는 요즘 걱정이 태산이다. 북한 미사일 이야기로 TV가 시끄러운 날이면 어김없이 쌀과 라면이 떨어지지 않았는지 물어본다. 그럴 때마다 대한민국의 50대 가장은 걱정할 필요 없다고 장담한 뒤 혼자 곰곰이 생각한다. 만약 전쟁이 나면 우리 가족은 모두 살아남을 수 있을까. 헤어져 평생 서로를 그리워하게 되는 건 아닐까. 밥을 굶지는 않을까. 경제가 완전히 무너지는 것일까. 끝난 뒤에도 회사에 다니며 월급을 받을 수 있을까….

상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일이다. 그렇지만 무작정 영화 같은 이야기라고 무시할 수도 없다. 지금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국의 군사적 대치 상황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핵과 미사일 개발에 목숨을 건 북한은 전쟁이 언제 터지느냐는 시점의 문제만 남았다고 악을 쓴다. 미 공군은 스텔스기 24대를 포함해 최신예 전투기를 동원한 사상 최대 공중 연합작전을 한국 공군과 함께 벌이고 있다. 오산공군기지에서 출격한 F-22 스텔스기가 평양에 도달하는 시간은 불과 10분이다. 김정은은 아예 평양을 떠나 압록강 근처를 돌고 있다고 한다.

북한과의 국경지대를 관할하는 중국군 북부전구사령부는 지난달 말 동계훈련 ‘옌한 2017’을 실전에 준하는 단계로 끌어올렸다. 러시아 해병대는 두만강 인근 국경지대에서 훈련 중이다. 일본 항공자위대는 주일미군 스텔스 전투기와 호흡을 맞추고 있다. 전투 행위만 없지 전면전을 가정한 군사 행동과 무력 시위가 오늘도 벌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수 없는 이유를 줄줄이 말할 수 있지만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로 제시할 수 있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앞으로 3개월이면 북한이 미국 주요 도시를 핵미사일로 공격할 능력을 갖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미국이 군사적으로 북한을 강하게 압박하는 것은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만약 이 기간 안에 북핵 제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면 미국이 선제공격에 나설 확률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미국의 입장이다. 우리의 상황은 훨씬 나쁘다. 북한은 이미 남한을 인질로 잡고 있다. 최근 1년 동안 한반도 주변 정세를 돌이켜보면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미국의 행동을 자제시키고 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지금 남한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미국이 선제공격을 시작하면 서울은 엄청난 피해를 본다. 북핵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채 시간을 끌어도 달라질 것은 없다. 미국과 북한이 줄다리기를 하는 동안 우리는 손이 묶인 채 쳐다보는 처지가 될 것이다. 남한을 핵미사일의 사정권에 둔 북한의 눈치를 살피며 중국의 윽박을 참아야 한다. 결국 우리의 생사를 다른 나라가 결정하는 최악의 사태로 이어질 것이다.

한동안 잊고 살았지만 전쟁은 사실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단어다. 1950년 시작된 남북한의 전면전은 엄밀히 말하면 아직 끝나지 않았다. 휴전협정을 맺고 불안한 평화 속에서 살았다. 그 사이 총과 대포를 쏘는 적대행위는 수없이 일어났다. 전면전으로 비화되지 않았을 뿐이다. 미국을 비롯한 주변 강대국의 한반도 현상유지 정책이 강한 억지력으로 작용하는 이유가 크다. 3년 전쟁의 상처가 너무 커 남북한 모두 전쟁에 다시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전쟁이 시작되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원초적 두려움. 우리의 심장에는 그것이 각인돼 있다.

그렇지만 더이상 그런 생각에 머무를 수 없다. 전쟁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진정한 평화는 오지 않는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전쟁을 막아야 하지만 죽지 않기 위해서라면 전쟁이라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같은 민족인데 총을 쏘겠느냐’는 말은 ‘괴뢰군은 이마에 뿔이 났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냉철하게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은 평화를 이룰 수 없다.

고승욱 논설위원 swk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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