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김학수] ‘책의 해’는 창의력 꽃피우기 기사의 사진
‘책의 해’가 다가온다. 25년 만이다. 정부는 새해를 다시 책의 해로 지정하고 출판문화를 육성하겠다고 다짐한다. 지금 우리가 영상문화와 출판문화 중 어느 것에 더 익숙한가. 방송과 영화가 신문과 책보다 시민의 일상을 더 점유하고 있지 않은가. 문자읽기가 영상보기보다 훨씬 더 많은 집중력과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한 앞으로도 영상문화가 더 넘쳐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출판문화를 육성하겠다는 당위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제4차 산업혁명은 로봇을 비롯해 고도의 인공지능(AI)을 갖춘 스마트 기기들이 범람하는 세상이다. 그것이 끼칠 가장 큰 영향은 노동의 혁명이다. 의사와 변호사, 교수 등 전문가를 포함해서 틀에 박힌 노동을 하는 어느 누구든 인공지능 기기가 대체할 것이다. 이것은 곧 새로움에 천착한 창의적 작업을 하지 않으면 누구나 쓸모없는 인간으로 전락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바로 국민 전체의 ‘창의력’을 진작시켜야 할 시대적 과제가 존재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책의 해가 져야 할 가장 큰 책무도 창의적 국민을 기르는 과업에 일조하는 일이다.

인류의 진정한 문명은 문자 발명에서 출발했다. 역사의 시작을 5000년 전으로 보는 이유도 그때부터 인류가 최초의 문자를 만들어 동굴과 암벽에 새기기 시작한 데 있다. 인간 지성의 발달도 다양한 문자 발명과 함께 진행됐다. 수학의 기호, 음악의 음표, 세종대왕의 한글, 피카소의 큐비즘, 컴퓨터 프로그램까지 모두 언어 발명의 끝없는 역사를 보여준다. 그러면서 우리의 지성은 더욱 창의적으로 나아갔고, 제4차 산업혁명까지 내다보게 되었다. 다양한 문자의 탄생이 곧 문명과 지성, 그리고 창의력 발달의 근간이다.

인간은 그런 언어들을 비교적 쉽게 습득한다.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는 우리가 보편문법(UG)을 두뇌에 갖고 태어나기 때문에 어떤 언어든 용이하게 배운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행동심리학자 B F 스키너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인간이 언어를 지득한다고 말한다. 흔히 교육의 세 기둥으로 3R, 즉 읽기(Reading), 쓰기(wRiting), 그리고 산수(aRithmetic)의 연마를 중요시하는 이유도 다양한 언어 배우기와 그것을 통해 인류가 축적한 지식과 문화를 전수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의 배움은 곧 인지 세계 확장인 셈이다. 글 읽기의 소중함도 그런 기능에 있다.

그런데 읽기와 쓰기를 분리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누구나 책을 읽을 수 있지만 쓸 수는 없는 법이다. 글쓰기는 인간의 사고 내용을 상징 언어로 바꿔놓는 일이다. 그런 언어화 작업은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고 타인과 소통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사고 내용을 객관화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고 구조와 언어 구조의 불일치 때문에 언어화 과정에 엄청난 창의력과 치밀함이 요구된다. 반면에 글 읽기는 주어진 상징 언어를 자기 나름대로 이해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글쓰기는 창의력을 높이는 데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수단이다. 이번 책의 해가 ‘책 읽기’를 넘어 ‘책 쓰기’ 운동으로 나아가야 할 이유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어떤 새 언어를 발명해도 인간의 무한한 사고능력을 온전히 수용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훌륭한 글도 완벽하게 명료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읽는 이에게 질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의미를 압축시킨 글일수록 독자가 더 많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어려운 책’ 읽기가 창의력 증진에 큰 도움을 주는 기반이 바로 그들 질문에 품어 있다. 이번 책의 해가 지나치게 ‘가벼운 책’ 만들기나 읽기운동이지 않기를 바라는 연유다.

언어의 위대성은 또한 상상력에 의한 가능성의 세계를 현실로 끌어오는 데 있다. 꿈과 희망을 글로 옮겼을 때 거의 만질 수 있는 실제와 맞닿는 것 같은 경험을 한다. 소위 인문학적 상상력에서 상상력은 인문학의 독점 영역이 될 수 없다. 과학기술 내지 예술의 상상력 또한 그에 못지않게 소중하고 우리네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러나 인문학이 활용하는 일상 언어는 숫자 내지 그림 언어보다 덜 제한적이고 보다 풍요로운 아이디어를 옮겨낼 수 있다. 그러므로 인문학적 상상력은 그런 마술 같은 일상 언어에 대한 존중을 함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책의 해가 지향해야 할 목표가 명백한 것처럼 보인다. 즉 국민 전체의 창의력을 높이는 데 있다. 그것은 글쓰기, 아니 책 쓰기에서 가장 잘 구현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국민 전체가 한 권의 책을 쓰는 언어의 마술에 걸려들 때 국민의 창의력은 저절로 높아질 것이다. 그러면 책 출판과 소비 또한 자연스레 부흥할 것이다.

김학수 DGIST 커뮤니케이션학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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