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세 김병기 화백-이호재 가나아트 회장, 32년 ‘아름다운 동행’ 기사의 사진
김병기 화백(오른쪽)과 이호재 가나아트·서울옥션 회장이 이달 초 김 화백의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작업실에서 만나 담소를 나누고 있다. 두 사람은 1985년 작가와 화랑주로 만나 32년간 인연을 이어가며 부모 자식 같은 끈끈한 사이가 됐다. 곽경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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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계산 관계 넘어 디아스포라적 운명체”

"선생님이 큰 거 드시고 저는 작은 거 주세요." "아니에요. 나는 좀 전에 많이 먹었어."

이달 초 겨울 햇볕이 부드럽게 비쳐드는 작업실의 늦은 오후. 주황색 소파에 나란히 앉아 간식으로 나온 빵 조각을 놓고도 양보하는 모습이 아버지와 아들처럼 정답다. 그러면서도 육십이 넘은 초로의 화상(畵商)은 어려운 분 앞에 앉은 듯 무릎 위 손을 모으고 공손히 대화를 이어간다.

이호재(63) 가나아트·서울옥션 회장과 101세 최고령 화가 김병기 화백. 화상과 작가로 만나 어느새 30년 넘는 인연이 됐다.

팔팔했던 청춘인 29세에 ‘가나화랑’(가나아트갤러리 전신)을 창업했던 신생 화랑주는 검은 머리에 서리 앉는 나이가 됐고, 갤러리와 옥션을 함께 거느린 한국 미술시장의 대표주자로 우뚝 섰다. 그 화랑에서 우리 나이 칠십에 첫 귀국 개인전을 열었던 화가는 상상초월의 100세 장수 신화를 쓰며 지금도 개인전을 여는 현역 작가로 살고 있다.

두 사람에게 각각 경사가 생긴 건 지난여름과 가을이다. 김 화백은 지난 7월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됐다. 현역 최고령이다. 이 회장은 9월 프랑스 명품 문구업체 몽블랑이 수여하는 ‘몽블랑 문화예술후원자상’을 받았다. 인터뷰를 청했더니 아버지처럼 생각하는 김 화백과 함께하고 싶다고 해 같이 만났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의 정원 딸린 단독주택을 개조한 작업실은 이 회장이 후원해준 것이다. 이전까지 미국에서 거주했던 김 화백은 2014년 말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 이후 귀국해 2015년부터 이곳에서 지낸다.



-두 사람의 인연은 32년 전인 19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난 미술계에서 ‘증발’된 사람이었어요. 죽은 게 아니라 없어진 사람이었죠. 그런 나를 미술평론가 윤범모(현 동국대 석좌교수)씨가 미국 뉴욕주에서 찾아내 이 회장에게 연락했고, 이 회장이 전시를 열어준 것이야. (한국과의) 잃어버린 끈을 이어준 이가 이 회장이에요. 우리의 관계는 계산을 넘어선 것이야.”(김 화백)

“이듬해 첫 전시를 열었는데 그때 벌써 만 70세였어요. 가나화랑과 거래하는 작가 중 제일 연세가 많으셨지요. 그땐 이렇게 여러 번 전시할 거라곤 생각도 못했어요(웃음).”(이 회장)

일본 유학파로 추상미술을 이끌며 한국 미술계의 중추로 활동하던 김 화백은 65년 브라질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로 갔다가 귀국하지 않았다. 49세의 나이. 미술계 정치를 피해 오직 작가로 살고 싶다는 일념으로 미국 뉴욕주 한적한 시골 동네인 사라토가 스프링스에 잔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후 그는 한국 화단에서 잊혀진 존재가 됐다. 패기 넘쳤던 젊은 화랑주인 이호재는 윤 교수 연락을 받고 바로 미국으로 달려갔다. 김 화백이 “그때 이호재는 베트콩 같았어”라고 표현하던 시절이다. 83년 화랑을 차린 지 1년 만에 당시 최대 아트페어였던 프랑스 파리의 피악(FIAC)에 진출했고, 김환기 이응로 등 해외 체류 한국작가를 찾아 뉴욕과 파리를 겁 없이 동분서주하던 시절이니 그렇게 부를 만했다. 그리하여 86년 가나화랑에서 ‘김병기 초대전’이 열렸다. 미국 잠적 이후 21년 만의 귀국전. 센세이셔널했다.

-1년 뒤 다시 전시회가 열렸다. 쉽지 않은 일이다.

“선생님의 작품은 서양화인데도 동양화의 여백이 있는 게 끌리더라고요. 절제 있는 그림…. 그런 걸 본 적이 없었어요. 첫 귀국전 때 작품이 제법 팔렸어요. 주요 미술관에도 들어가고요. 그런데 선생님이 작품값 대신 아틀리에 제공을 요청했어요. 서울에 머물면서 조국 산천 여행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싶다는 거였어요. 그러더니 1년 만에 전시회를 다시 열 만큼 새로운 작품을 생산하시는 겁니다. 그 연세에 정말 열정적이셨어요. 봇물 터지듯 했지요. 칠순의 그림이 아니라 청년의 그림 같았어요.”(이 회장)

전시 도록을 꺼내 설명하던 이 회장은 한 그림을 가리키며 “이거 보세요. 전 이 작품이 가장 마음에 들었어요”라고 말했다. 85년 작 ‘풀은 마르고’다. 화병에 긴 풀이 꽂혀 있는 반구상 작품이다. 미국 고속도로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어른 키보다 더 큰 장풀(tall grass)을 화병에 꽂아 그린 것이다. 김 화백이 갑자기 연극배우처럼 소리 높여 말했다.

“나는 ‘풀의 화가’예요. 성경에 있지요.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라(이사야서 40장 6절). 나는 서울과 도쿄 등 도시에서 생활하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미국에선 아는 사람 없는 시골 사라토가에 살았어요. 이사야서의 말씀이 실감으로 다가왔어요. 미국은 하이웨이 나라입니다. 고속도로 주변에 장풀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양을 보며 미국이라는 광야를 사는 한국 백성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미국 체류 시절 디아스포라적 외로움 때문이었을까. 디아스포라는 유대인 처럼 타국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을 뜻한다. 2남3녀의 자녀를 둔 김 화백은 두 사람의 관계를 ‘디아스포라의 만남’이라며 가족만큼 끈끈한 관계임을 거듭 강조했다. “이건 의도해서 만나진 게 아니에요. 초월적인 힘이 우리를 만나게 한 겁니다. 보통의 화랑과 작가 사이 관계와는 달라요. 그 이상이에요. 우리 관계는 수학으로 치면 고등수학에 속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95년 아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미국까지 달려와 마누라 무덤에 넙죽 절하는 걸 보고 뭉클했다”고 회고했다. 이 회장은 “선생님이 제 주례를 섰어요”라고 맞장구를 쳤다. 따져보니 두 집안은 조상 때부터 돈독했다. 이 회장 며느리(장남 이정룡 대표의 아내)의 증조할아버지인 독립투사 김병연 선생은 김 화백의 장인인 김동원 제헌국회 부의장과 아주 절친했다고 한다. 이런 걸 얘기할 때는 젊은 이 회장보다 김 화백의 기억력이 더 정확하다. “잠깐, 가만있어 보세요”하면서 이내 정확한 연도, 정확한 이름을 대는 식이다.

-김 화백은 팔십에 파리 유학 소원을 푸셨다는데.

“프랑스 파리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싶었던 청년 시기가 있었지만 안 됐어요. 도쿄 유학을 갈 때도 아버지가 가고 싶으면 언제든 파리로 가라고 했었는데요. 우리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는 어떤 초월적인 뜻이 있는 게지요. 도쿄 유학 시절 “미라보 다리 아래로 센강이 흐르고…”라는 아폴리네르 시를 외우며 파리를 생각했지요. 그런데 어쩌다 미국에 살게 됐고 포기하며 살았는데 이 회장 덕분에 그걸 이뤘어요.”(김 화백)

“선생님이 어느 날 파리에 가고 싶다는 겁니다. 그거면 우리가 해드릴 수 있다고 했지요. 파리의 시테(파리국제예술공동체)에 우리가 장기임대한 레지던시가 있거든요. 거기 보내드리는 거니 어려운 건 아니었지요.”(이 회장)

김 화백은 평양 갑부 집안 출신이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고희동 김관호에 이은 세 번째 서양화가이자 영화제작자 컬렉터였던 김찬영(1889∼1973)이다. 하지만 6·25때 가옥이 폭격당하면서 당대 최고 수준의 컬렉션은 잿더미가 됐다.

화상이 보는 작가 김병기, 작가가 보는 화상 이호재는 어떤 사람일까. “영원한 청년” “의리의 남자”라는 답이 돌아왔다.

“우리나라 미술을 이끌어가는 사람이지요. 보통 사람은 아니죠. 그중에서 의리가 굉장히 강한 사람이에요. 이호재씨랑 관계한 사람들은 아주 오랫동안, 수십 년씩 인연을 맺고 있어요. 나도 그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한 번 얘기하면 약속을 항상 실현하는 사람입니다. 어김이 없어요.”(김 화백)

김 화백은 지난해 백세 기념전 ‘백세청풍-바람이 일어나다’를 비롯해 지금까지 가나아트갤러리와 다섯 번의 전시를 했다. 내년 4월에도 102세 생일에 즈음해 2년 만에 개인전을 갖는다. 젊은 작가도 쉽지 않은 창작욕이다. 유화 신작이 15점 이상은 나와야 개인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문제없어요. 팔당호 주변에 조선시대 도자기 분원이 있어요. 신작에는 거기를 그린 것도 포함될 거예요.”

김 화백이 예술가 최고 영광인 예술원 회원이 된 건 특히 감개무량한 일이다. 2015년 미국 시민권자에서 한국 국적을 회복했기 때문이다. 그는 54년 예술원 창립을 주도한 인물이다. 김 화백은 “예술원을 내가 만들었지만 (미국에서 오래 살다보니) 예술원 회원이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다”며 감회를 말했다. 그러곤 “회장님 같은 화상이 구체적으로 미술시장을 리드하는 사람이지요. 전시하고 선전하며 화상들이 움직이는 거고, 작가는 묵묵히 그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라고 이 회장에게 공을 돌렸다. 이 회장은 “100살이 넘어 붓 들고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는 게 미술사적으로 흔치 않지요. 선생님을 70세때 만났어요. 매번 전람회를 할 때마다 새로운 걸 보여주니 화상으로서 이보다 더 큰 복이 없다”고 화답했다. 작가와 갤러리는 어떻게 동고동락하며 미술계를 살찌우는가, 두 사람의 32년 아름다운 인연이 그 답을 주고 있다.

■金화백은…

1916년 평양 출생. 33년 평양 광성고보를 졸업한 후 일본에 건너가 가와바타화학교에 입학했다. 36년부터 문화학원에서 수업하며 초현실주의와 추상미술의 세례를 받았다. 39년 귀국해 결혼했다. 44년 이중섭 문학수 황염수 등과 평양에서 '6인전'을 열었다. 47년 월남한 뒤 한국전쟁 중 종군화가단 부단장을 지냈다. 서울대 강사, 서울예술고등학교 제1대 미술과장을 지내며 미술교육에도 힘썼다. 64년 서울미술협회 이사장을 맡아 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커미셔너 자격으로 브라질에 간 후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 정착했다. 2014년 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다.

■李회장은…

1954년 서울 출생. 경희대 경영학과 졸업 후 고려화랑에서 일하다 83년 가나화랑(가나아트갤러리 전신)을 설립했다.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고 '가나다'식 한글 자모에서 이름을 땄다.

84년부터 국내 첫 전속작가제 도입, 프랑스 파리 아트페어인 피악(FIAC) 진출, 파리 시테 스튜디오 마련 등 공격적인 행보에 나섰다. 98년 한국 최초 경매회사인 서울경매(서울옥션 전신)을 세우고 홍콩에도 진출해 2015년엔 연간 낙찰총액이 1000억원을 넘어섰다. 2006년 경기도 장흥 작가 아틀리에, 2014년 가나문화재단 설립 등 후원 활동을 펼치고 있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사진=곽경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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