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한장희] ‘넛지 관치’도 관치다 기사의 사진
자유 배식을 하는 학교. 같은 메뉴인데 진열대의 배열만 바꿔봤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맛과 모양은 그대로인데 일부 음식은 전보다 25% 이상 소비가 늘었다. 배열에 특정한 방식을 적용했더니 권유 없이도 학생들이 건강에 이로운 음식을 더 섭취하게 된 것이다. 남자용 소변기 중앙 부분에 파리를 그려 넣으니까 변기 밖으로 튀는 소변량이 80%나 감소했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행동경제학, 그중에서도 ‘넛지(nudge) 이론’을 설명할 때 쓰이는 예들이다.

‘팔꿈치로 슬쩍 찌르다’는 뜻의 넛지. 요즘엔 특정 분야 설계자가 어떤 선택을 금지하거나 인센티브를 주지 않고도 예상 가능한 방향으로 사람들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통한다. 행동경제학을 체계화한 공로로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리처드 세일러 교수의 베스트셀러 제목이기도 하다.

금융권에선 요즘 ‘넛지 관치’라는 말이 자주 들린다. 당국이 밀어붙이기식 관치를 하는 대신 옆구리를 찔러 민간부문 최고경영자(CEO) 인사에 개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팔 비틀기’ 이런 말을 듣고 싶지는 않고, 그렇다고 맘에 들지 않는 인사를 그냥 둘 수만은 없고…. 이런 심리가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물론 당국은 부인한다. 가이드라인을 줬을 뿐 인사 개입 의도는 전혀 없다고 한다. CEO 자리를 놓고 집안싸움을 벌였던 KB·신한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해 만든 금융회사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과 내부규범을 준수하라고 강조한 것뿐이라는 얘기다. 설사 압박을 느꼈다고 해도 사정기관을 동원해 CEO 사퇴를 종용했던 과거 행태와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느냐며 억울함도 호소한다.

하지만 금융당국 수장들의 최근 발언은 오해를 사기에 충분하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경쟁 후보 인사 조치 등으로 혼자 연임을 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CEO들의 ‘셀프 연임’ 시도를 강하게 질타했다. 최흥식 금융감독원장도 금융지주사들의 경영권 승계프로그램이 허술해 검사를 벌이겠다고 맞장구를 쳤다. 일각에선 연임 문제를 ‘기득권 문제’로 규정한 당국이 결국 ‘적폐몰이’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는다.

개인적으론 당국의 선의를 믿고 싶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해외 금융당국도 금융사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고삐를 죄고 나선 마당에 우리도 예외일 수 없다는 논리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려는 가시지 않는다. 한국만의 특수성 때문이다. ‘인사에 대한 훈수’는 아무리 부드러운 방식이라도 시장에 잘못된 시그널을 줄 수 있다. 특히 금융권은 더하다. 외환위기 이후 계속된 이합집산의 여파로 은행은 어떤 조직보다 파벌 갈등이 심하다. CEO 교체기만 되면 ‘누구는 청와대가 밀고 있다’ 등 각종 설이 난무하고, 사정기관엔 비리 제보 투서가 쏟아진다.

오너 없는 금융사 CEO 자리는 정권의 먹잇감이었다는 기억이 지워지지 않은 상황에서 당국이 옆구리 찌르기식 인사 개입에 나선다면 금융권의 구악이 되살아날 가능성도 높아진다. 정권 내내 줄대기 경쟁과 정권 말 ‘낮엔 은행원, 밤엔 캠프 인사’ 행태가 재연될 수 있다. 또 규제의 객체인 은행을 향한 정권 주변인사의 은밀한 취업 청탁과 ‘최순실 특혜대출 2탄’이 재발하지 말라는 보장도 없다.

관치의 이미지는 자연스러움보다 억지스러움에 더 가깝다. 억지스럽다면 넛지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넛지 관치라는 용어는 형용 모순인 셈이다. ‘작심’이라는 제목이 달려 나오는 금융당국 수장의 발언 보도를 접한 금융사들도 넛지보다 ‘진화된 관치’ 정도로 여기는 분위기다. 얼마 전 사임한 은행장과 관련해 ‘눈짓을 줬는데 윙크로 착각했었다’는 평가가 있었다. 결국 시장은 그의 사임 배경에 당국의 압박이 있었다고 해석한 것이다. 그나저나 당국은 지금 금융사들과의 기싸움보다 1400조원이 넘는 가계부채 문제와 ‘집단 패닉’으로 이어질 수 있는 비트코인 광풍 문제에 매달려야 하는 건 아닌지.

한장희 경제부장 jhhan@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