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이명희] 스타일리스트 김상조의 셀프 재벌개혁 기사의 사진
지난 대선 때 홍준표 당시 자유한국당 후보를 제외한 모든 대선 후보의 제1공약은 재벌개혁이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 대기업 간 ‘은밀한 거래’에 국민들은 말할 수 없는 참담함과 분노를 느꼈다. 최순실의 사적인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에 앞다퉈 출연금을 내거나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승마 지원을 대가로 그룹 민원을 해결한 글로벌 기업답지 않은 후진적 관행에 국민들의 자긍심은 무너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재벌개혁이라는 해묵은 숙제를 맡을 공정거래위원장에 김상조 한성대 교수를 임명했을 때 그만큼 국민들의 기대가 컸다. ‘재벌 저격수’ ‘재계 저승사자’로 불리던 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취임 6개월이 지나도록 기대했던 결과물은 나오지 않고 있다. 김 위원장은 지난 6월 삼성 현대차 SK LG 등 4대 그룹 경영인과의 첫 만남에서 “재벌개혁을 몰아치기식으로 하지 않겠다. 기업 스스로 사회와 시장의 기대에 부응하는 자발적인 노력을 해 달라”고 했다. 지난달 초에도 5대 그룹 전문경영인을 만나 “칼춤 추듯 기업개혁을 할 생각은 없다”면서 “1차 데드라인은 12월 말”이라고 재차 독촉했다. 며칠 전 기자간담회에서는 “대저택(재벌)을 불태우지 않고 적절히 리노베이션(개·보수)할 것”이라며 “혁명이 아닌 진화하는 방식으로 공정경제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기업들은 여전히 답안지를 내밀지 않고 있다.

재벌개혁의 핵심은 적은 지분으로 수십개의 계열사를 장악하면서 편법으로 경영권을 승계하고 총수 일가의 배만 불리는 지배구조를 투명하게 바꾸는 일이다. 3세로의 경영권 승계작업이 끝나지 않은 삼성이나 현대차로선 쉽지 않은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다. 김 위원장의 의도대로 기업들이 알아서 숙제를 해준다면 굳이 칼춤을 출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가 상아탑에서 공부했던 이론과 현실은 다를 것이다.

역대 정권마다 재벌개혁을 기치로 내걸었다. 편법 대물림과 일감 몰아주기 등을 통해 부를 축적한 대기업들에 대한 반감이 큰 우리 사회에서 재벌개혁은 민심을 추동하는 단골 메뉴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3년 처음으로 민간인 출신의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에게 시장개혁을 맡겼다. 그러나 오히려 삼성공화국을 공고히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노 전 대통령과 부산상고 선후배 사이인 이학수 전 삼성 부회장과의 인연이 영향을 미쳤다고 회자된다. ‘기업 프렌들리’ 정책을 편 이명박 전 대통령을 제외하고 박근혜 전 대통령도 2012년 대선 때 김종인씨를 영입해 경제민주화에 공을 들였다. 하지만 취임 6개월이 지나면서 총수의 전횡을 막고 의사결정을 민주화하기 위한 상법 개정안을 백지화했다. 기업들의 반발과 이를 대변하는 일부 언론들의 비판이 거셌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막대한 부는 막대한 영향력을 의미한다. 단지 정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공적인 담론에서도 그렇다. 정부는 단순히 부유층의 목소리를 증폭하는 확성기 역할을 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누가 고위 공직자의 자격을 얻을 것이며 누구의 이해관계가 윗선에서 받아들여질 것인지도 부에 의해 결정된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출범을 지켜보면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가 공저 ‘애프터 피케티’에서 한 진단이다. 우리나라 상황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그만큼 재벌개혁은 저항이 크고 지난한 과제다.

한 전직 장관은 김 위원장을 ‘스타일리스트’에 비유했다. 말만 앞세운다는 의미일 터다. 공정위가 총수 일가의 지배력 확대에 편법으로 동원된다는 비판을 받아온 대기업 공익법인 조사에 나서고 2년 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청와대 외압으로 줄여준 삼성물산 주식을 추가 매각하도록 한 것을 재벌개혁의 신호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김 위원장의 ‘셀프 개혁’ 주문이 기업들에 먹힐지 지켜볼 일이다.

이명희 논설위원 mhee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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