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뷰-김철홍] 영화 ‘레 미제라블’과 적폐청산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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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에 개봉된 영화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은 590만 명이 관람한 뮤지컬 영화다. 장 발장은 노동자로서,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의 징역을 산 뒤 가석방된다. 그는 미리엘 신부의 도움으로 살던 중 성당의 은그릇을 훔쳐 도망가다가 경찰에 체포된다. 하지만 미리엘 신부는 경찰에게 장 발장이 갖고 있는 은그릇은 자신이 준 것이라고 말해 그가 감옥으로 돌아가지 않게 한다. 그 후 장 발장은 마들렌이라는 이름의 사업가로 변신한다. 그를 변화시킨 것은 법에 의한 처벌이 아니라, 미리엘 신부를 통해 얻은 ‘용서의 은총’을 받는 경험이었다. 이 용서의 경험을 통해 장 발장은 마들렌이란 전혀 다른 인간으로 새롭게 탄생한다. 그래서 ‘자본의 원시적 축적’ 기간에 자본가로 살아가면서도 마들렌은 무자비하게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고 가난한 자들에게 선행을 베풀어 ‘은총 안에서’ 중생(重生)한 기독교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장 발장이 복음의 은혜 안에서 용서받은 죄인을 상징한다면, 자베르는 범죄자를 체포하여 반드시 그 범죄에 해당하는 처벌을 받게 하려고 노력하는 경찰이다. 그의 존재 그 자체가 법치주의 기초다. 그에게 장 발장은 단지 죄수번호 24601일 뿐이다. 그런데 자베르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살로 그의 인생을 마감하고 만다. 자베르는 왜 자살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그가 지금까지 믿어온 ‘종교’인 율법주의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은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한다’는 그의 원칙이 무너져버렸기 때문이다. 자베르의 죽음은 결코 법/율법이 인간을 변화시켜 궁극적으로 인간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없으며, 오직 복음을 통해 주어지는 죄용서의 은총만이 죄인을 인간다운 삶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빅토르 위고가 이 작품을 통해서 우리를 향해 던지는 질문은 ‘과연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은 무엇인가? 율법인가 아니면 복음인가?’이다.

그렇다면 장 발장과 자베르, 이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근본적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의(自己義, self-righteousness)다. 장 발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철저하게 죄인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자베르는 자신을 죄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을 법과 정의의 편에 서 있는 사람으로만 인식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자베르는 자기의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 장 발장이야말로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그는 이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살하고 만다. ‘나는 의롭고 너는 불의하다’ 그러므로 ‘나는 너를 법에 의해 처벌받게 할 것이고 이것이 나의 존재 목적이다’라고 믿는 자베르의 이런 잘못된 신념은 그를 결국 파멸의 길로 인도한다. 자신과 남을 모두 죄인으로 인식할 때 인간은 비로소 남을 정죄(to condemn)하고 자신을 심판자(judge)로 착각하는 정신병에서 자유롭게 된다. 만약 자베르가 자기의의 화신이 아니라 스스로를 용서받은 죄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면, 과연 그의 인생을 자살로 마무리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의는 인간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독배(毒杯)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현재의 적폐청산에 대해 갖고 있는 우려는 현 정부와 그 지지 세력들이 자기의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적폐청산위원회가 죄인들의 목록을 만들어 검찰에 넘겨 법적 처벌을 받게 할 때, 적폐청산위원회가 먼저 국회를 통해 자신들의 활동을 뒷받침할 수 있는 법을 제정한 뒤에 법률적 근거를 갖고 활동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이런 절차를 무시한 것은 국가 행정체계 문란행위다.

적폐청산 태스크포스는 ‘정부조직법’이나 ‘행정기관 소속위원회 설치 운영법’ 등 관련법 등을 무시하는 초법적 발상에서 시작되었다. 청와대와 여당에는 이런 법적 절차가 필요하다는 걸 몰라서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절차상의 정의를 이렇게 무시하는 것은 현 정권이 자신을 ‘정의의 사도’로 보고 있고, 자베르처럼 자기의로 똘똘 뭉쳐져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우리는 정의롭고, 너희는 불의하니 잔소리 말고 우리의 심판을 받으라’는 것이며, ‘어차피 절차상의 정의를 무시해도 우리는 정의롭기 때문에 상관없다’는 주장처럼 들린다. 자기의라는 독배가 또 다시 자기 파멸로 이끌지 않을까 걱정된다. 자신을 죄인으로 보고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 안에서 살아가는 장 발장의 삶이 오늘따라 너무나 아름답게 보인다.

글=김철홍(장신대 교수·신약성서학), 삽화=전진이 기자

※이 칼럼은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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