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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손수호] 문장을 되치기 당하다니…

[청사초롱-손수호] 문장을 되치기 당하다니… 기사의 사진
2년 전인 2015년 12월 28일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합의문을 발표하던 역사적 장면이 떠오른다. 일본 정부의 책임과 사죄, 치유재단 설립이라는 1, 2항을 듣다가 3항에 이르러서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 “이번 발표를 통해 일본 정부와 함께 이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함.” 불가역(不可逆)이라니, 이런 무지막지한 단어를 사용할 수 있나 하고 의구심을 가졌는데, 지난달 ‘한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검토 태스크포스’가 내놓은 발표문에 그 사연이 담겨 있다. 우리 쪽이 먼저 총리 사죄의 불가역성을 담보하기 위해 내각 결정을 거친 사죄 표명을 요구했으나 협상이 진행되면서 ‘사죄’의 불가역성이 ‘해결’의 불가역성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백주에 도깨비한테 홀리듯 상대의 허점을 이용하는 일본의 되치기 기술에 당한 것이다.

사실 외교는 늘 어렵다. 어느 시대든 외교가 수월한 나라는 없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낀 우리는 더하다. 국제정세는 예측이 어렵고, 적과 우방이 뒤섞이며, 국민감정과 비즈니스의 물결이 요동친다. 그중에서도 일본은 영토와 역사를 놓고 1㎜도 물러설 수 없는 상대다. 외교관들은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른 뒤 문서에 국가의지를 담는다. 국가 간 문서는 천금의 무게를 지니기에 신중에 신중을 거듭한다.

한·일 위안부 합의는 어떤가. 새롭게 드러난 자료를 보면 언어를 장악하려는 일본의 반문화적 태도가 두드러진다. ‘성노예’라는 말을 쓰지 말도록 요구한 것이 단적인 예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Comfort Women’의 경우 자발성이 내포된 느낌을 준다며 ‘Enforced sex slaves’라고 표기했고, 미국 연방 하원도 2007년 일본군 성노예 결의안에서 ‘Sex Slavery’로 적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성노예(Sexual Slavery)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일본은 ‘성노예’를 금칙어로 묶어 불길한 메시지의 전파를 막고 싶었던 것이다.

일본은 조형물에도 매달린다. 상징이 의식을 흔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에 ‘평화의 소녀상’이 들어설 기미가 보이면 정부와 민간이 하나가 된다. 기존의 원조가 있으면 끊겠다고 위협하고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원조를 제공하겠다는 사탕발림으로 무산시킨다. 우리 정부에 “제3국에 비(碑)나 상(像)을 설치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집요하게 강조하면서 민간의 움직임까지 막아달라고 하는 이유다.

일본은 알아야 한다. ‘불가역’을 넣고 ‘성노예’를 뺐다고 쾌재를 부를 일은 아님을. 언어는 외교로 결박할 수 없을뿐더러 그런 문장 하나로 국가범죄가 면책되는 것도 아니다. 일본의 양식 있는 언론이 “피해자의 시점이 결여돼 있다는 지적에 겸허하게 귀를 기울이라”고 충고했듯이 문장이 아니라 피해자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나눔의 집에 있는 할머니들의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화살은 안으로도 향한다. 무엇보다 지도자의 인식과 국민 생각의 간극이 너무 컸다. 살아있는 피해자의 입장을 살피지 않았다. 사안의 중대성에 비추어 속도전으로 밀어붙일 일이 아닌데도 ‘연말’이라는 시간에 쫓겨 부실한 결과를 만든 것도 실책이다. ‘불가역’의 문장을 되치기 당한 과정을 복기해 보면 얼마나 허둥댔는지 눈에 잡힌다. 이런 문장을 들고 국민 앞에 나서도 괜찮다는 무감각 또한 무섭다.

결국 우리 국민의 정신적 깊이 혹은 견고함의 문제다. 가끔 지도층 인사를 만나다 보면 말은 청산유수인데 그걸 글로 옮기면 횡설수설인 경우가 있다. 말과 글은 다르다. 자신의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거나, 상대방 표현에 담긴 뜻을 제대로 읽지 못하면 사회적 능력이 부족한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조사를 보면 일본의 고급 문해력(literacy) 인구 비중이 우리보다 3배에 달한다. 외교관들은 외국어를 학습하기 이전에 우리글 읽기와 쓰기 공부를 다시 해야겠다.

손수호 객원논설위원 (인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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