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자코메티의 예술세계] 예술적 삶이란 일상을 재현하는 자에게 주는 신의 선물 기사의 사진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1927년 완성한 작품 ‘숟가락 여인’. 높이가 144㎝에 달하는 이 조각은 현대미술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 중 하나다.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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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

일상은 나를 지배한다. 이른 아침 눈을 뜨는 시간부터 늦은 저녁 눈을 감기까지 나는 일상이 정해놓은 시간과 장소 안에서 활동한다. 나의 소중한 하루를 나를 위한 최선의 하루, 신이 원하는 거룩한 하루로 만들기 위해 내가 조각해야 할 환경은 내 일상이다.

거룩한 여정을 완주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몸을 최대한 가볍게 만들어야한다. 그것은 마치 42.195㎞를 달리는 마라톤 선수가 경기 전에 준비를 하는 것과 같다. 선수는 코스를 완주하기 위해 거추장스러운 것들이 무엇인지 가려내 버려야한다. 이 행위가 바로 ‘조각’이다.

나는 매일 하루라는 ‘일상’을 조각할 수밖에 없다. 하루는 내가 가진 전부이기 때문이다. 감동적인 예술작품을 만들기 위해 일상에서 쓸데없는 것들을 걷어낼 때, 일상은 나에게 특별한 것을 선물한다. 우리는 이 선물을 ‘거룩’이라고 부른다. ‘거룩’이란 원래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홀로 빛을 내 모든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숭배할 수 있는 그런 대상도 아니다. 일상 속에 숨어있는 보물이다.

그것은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천국에 대한 비유처럼, ‘밭에 숨겨진 보화’와 같다. 밭은 농부의 일상이다. 농부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곳에서 땀을 흘린다. 봄에는 씨를 뿌리고 여름에는 김을 매고 가을에는 추수한다. 자연이 만들어주는 곡식으로 농부는 생명을 유지한다.

그러던 어느 날, 농부는 그 지긋지긋한 밭을 갈다가 보화가 담긴 보물 상자를 발견한다. 예수님이 이 비유로 천국을 설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천국이 발견되는 장소는 ‘일상’이라는 밭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다만 그 보물은 은닉되어있으니 일상을 섬세하게 살피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거룩’이란 히브리 단어 ‘코데쉬’의 원래 의미는 ‘구별’이다. 거룩이란 일상의 재발견이며 구별이다.

사막의 한 돌

여기 돌이 하나 있다. 아무도 모르는 사막에 버려진 돌이다. 그곳을 지나는 목동들이 그 돌을 특별하게 여길 리 없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사는 종말론적 인간에게는 그런 돌조차 거룩하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이와 관련된 이야기 하나가 전해져 내려온다. 고대 이스라엘 족장 이삭에겐 두 아들이 있었다. 첫 아들은 신체가 건강하고 집밖에서 사냥을 하며 먹을 것을 구해오는 ‘에서’이고 둘째 아들은 어머니 리브가를 도와 집안일을 하는 ‘야곱’이다.

야곱은 ‘발뒤꿈치’라는 의미로, 의기소침한 인간이었다. 리브가는 가문의 모든 재산이 관습에 따라 맏아들에게 넘어갈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성급한 에서보다 섬세한 야곱이 가문의 대를 이을 재목이라고 판단했다. 그녀는 야곱과 함께 계략을 꾸몄고, 야곱은 모든 재산을 낚아챈다. 하지만 형의 후환이 두려워 방랑 생활을 시작한다.

야곱은 고향을 떠나 먼 친척이 살고 있는 하란으로 가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 다다르면 자신의 부정한 행각이 발각될까봐 두려워했다. 그는 사막에서 자신의 옷을 이불로 삼아 하룻밤을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해가 지자 온도는 급격히 떨어졌다. 야곱은 자신이 차라리 아버지 집에 있었더라면, 배불리 먹고 편안히 잤을 것이라고 자책했다.

창세기 28장 11절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야곱이)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위 문장에서 반복되는 단어 하나가 있다. 바로 ‘장소’를 의미하는 단어 ‘곳’이다. 이 단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마콤’이다. ‘마콤’의 의미는 ‘내가 서있는 이 장소’, 다시 말하자면 ‘일상’이다. 야곱은 일상에서 돌 하나를 발견해 베개로 삼고 잠을 청한다. 성서에서 잠이란 신을 만나 원대한 꿈을 발견하는 시공간이다. 야곱은 이 일상의 공간에서 꿈을 꾸었다. 사닥다리의 끝이 하늘에 걸쳐지는 신기한 광경을 봤다. 야곱이 잠에서 깨어나 고백했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창 28:17)

야곱은 다시 ‘이곳’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바로 ‘마콤’이다. 야곱은 사막의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장소가 신이 계신 장소란 사실을 깨달았다. 사막의 일상의 보잘 것 없는 돌은 훗날 베델 성전의 주춧돌이 되었다.

아프리카 단 부족의 숟가락

자코메티는 1923년 파리 루브르박물관 옆에 위치한 조그만 장식미술관을 방문한다. 이곳에는 중세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장식 미술품이 전시돼 있었다.

특히 15세기 귀족들이 사용한 화려한 가구들이 눈길을 끌었다. 스물두 살 청년 자코메티는 당시 현대적인 삶과 그것에 어울리는 예술이 무엇일지 모색하고 있었다.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라, 자신이 찾을 주관적인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밭에 감춰진 보화를 찾듯 살아가고 있었다. 그를 사로잡은 예술품은 프랑스 귀족의 사치품이 아니라 머나먼 아프리카에서 온 보잘 것 없는 숟가락이었다. 그것은 라이베리아 단 부족이 사용하던 일상품이었다. 단 부족 여인들은 마을에 중요한 손님이 오면 이 숟가락으로 손님을 대접했다.

이 숟가락은 여인의 몸처럼 생겼다. 여인의 몸 전체가 자신을 찾아온 손님에게 대접할 음식을 담는 용기다. 숟가락의 윗부분에는 전형적인 아프리카 여인의 모습이 조각돼있다. 이 여인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 코는 오뚝하게 서있고 두툼한 입술은 굳게 닫혀있다. 정성을 다해 손님을 대접하겠다는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머리는 정교한 띠로 장식돼있다. 압권이다. 머리에 있는 저 장식은 일상의 시간을 알려주는 초승달일수도 있고 아니면, 힘의 상징인 황소의 뿔일 수도 있을 것이다.

숟가락 여인

자코메티는 자신이 본 단 부족의 숟가락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 결심은 그의 마음에서 싹을 틔웠다. ‘숟가락 여인’이라는 작품이 1927년 세상에 등장했다.

이 작품은 아마도 자코메티가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한 첫 번째 작품일 것이다. 이 조각품은 원래 이름은 ‘거대한 여인’이었다. 크기는 세로 144㎝, 가로 51㎝로 거의 사람의 키와 비슷하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움까지 느끼게 만든다.

자코메티는 이 조각품에서 여인보다는 숟가락을 표현했다. 추상적으로 보이는 조각상은 사실 부엌에서 매일 사용하는 부엌세간이다. ‘숟가락 여인’은 예술과 삶이라는 서로 다른 현실을 하나로 묶는다. 예술이란 범인의 눈에서 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것들을 솜씨 있게 엮어내는 기술이다. ‘숟가락 여인’은 유럽과 아프리카 예술의 접점이 됐다. 유럽에서 형성되고 있는 현대예술의 근간이 됐다.

‘숟가락 여인’은 아방가르드 예술작품이다. 이 조각상은 여인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귀스트 로댕의 여인조각은 우리가 보기에도 미적으로 매력적이며 아름답지만, 자코메티의 조각상에는 아름다움이 깊은 곳에 숨어 있다. 앤디 워홀의 작품처럼 대량 생산이 된다고 해도, 팝 예술작품이 될 가능성도 없다. 이 조각상은 간결하지만 추상적이어서 난해하다. 수수께기와도 같다. 작품을 바라보는 정면은 충격적이다. 이 작품은 보는 이를 불편하게 만든다.

‘숟가락 여인’은 무언가를 재현하지 않는다. 우리가 예상하는 무엇인가를 흉내 내고 재현하려는 전통적인 예술의 범주를 무시한다. 이것은 어떤 것 혹은 어떤 존재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 조각품은 우리로 하여금 예술작품 그 자체를 가만히 응시하라고 요구한다.

어린아이와 같은 호기심으로 무장한 사람만이 이 작품을 있는 그대로 쳐다볼 수 있다. 이 조각품은 소통하기를 거부한다. 그것 자체와 그것을 보는 우리의 간극을 만든다.

이 작품은 강력한 아우라를 품고 있다. 가만히 다가가서 있는 그대로를 관찰할 때, 비로소 자신의 비밀을 서서히 알려준다. 동시에 현대미학에서 말하는 이론적인 가정들을 소외시킨다. 우리는 이 작품을 한 여인에 대한 재현, 혹은 임신한 여성에 대한 추상적 표현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혹은 단순히 숟가락으로 여길 수도 있다.

독일 태생의 패션디자이너 칼 라거펠트가 2017년에 출시한 샤넬의 유명한 ‘둥그런 치마’는 자코메티의 ‘숟가락 여인’에서 영감을 받은 옷이었다. 예술적인 삶이나 거룩한 삶이란 일상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서 재현하는 자에게 주는 신의 선물이다.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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