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천지우] 이적의 수 기사의 사진
1846년 여름, 일본의 천재 기사 슈사쿠가 당대의 고수 겐낭 인세키와 맞붙었다. 바둑은 백을 쥔 인세키가 유리한 형세로 흘렀다. 그러던 중 만일의 사고를 대비해 대국장에 있던 의사가 방을 나오면서 “겐낭 선생이 질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의사는 바둑에는 문외한이었지만, 슈사쿠가 중앙에 127번째 수를 뒀을 때 겐낭의 양쪽 귀가 빨개지자 마음이 크게 동요한 것으로 봤다. 의사의 예측대로 결국 슈사쿠가 이겼다. 겐낭의 귀가 빨개진 수, 즉 ‘이적(耳赤)의 수’는 이후 바둑사에서 묘수 중의 묘수, 상대의 허를 찌르는 결정적인 수를 일컫는 말이 됐다.

최근 온라인 동영상 업체 넷플릭스를 통해 다큐멘터리 ‘알파고’가 공개됐다. 2016년 3월 인공지능(AI)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역사적인 대결을 다룬 작품이다. 당시 많은 이들의 예상을 깨고 알파고가 4승 1패로 이세돌을 꺾어 전 세계에 충격을 줬다. 다큐멘터리에는 알파고를 개발한 구글 딥마인드 프로그래머들의 노력과 이세돌의 분투가 잘 담겨 있다. 여기에 현대의 ‘이적의 수’라고 할 만한 수 2개가 나온다. 제2국에서 알파고가 둔 흑 37수와 제4국에서 이세돌이 둔 백 78수다.

흑 37수는 인간이라면 결코 두지 않는 ‘나쁜 수’였으나 이세돌은 그 수를 보고 깊은 고민에 빠졌고 결국 완패했다. 이세돌은 “기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수를 보는 순간 알파고도 충분히 창의적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털어놨다. 백 78수는 알파고의 귀를 벌겋게 만든 수라고 할 수 있다. 그 수 이후 알파고가 실수를 거듭해 이세돌의 감동적인 첫 승으로 이어졌다. 이세돌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반대로 시뮬레이션해보니 알파고가 그 수를 뒀을 확률은 0.007%에 불과했다.

미국 정보기술(IT) 전문지 와이어드의 케이드 메츠 기자는 “넓게 보면 흑 37수가 백 78수를 낳았다. 창조된 비생명체와 대국하면서 이세돌의 인간성이 확장됐다”고 평했다. 기계의 독창적인 수가 인간을 자극해 한 단계 더 올라서게 했다는 뜻이다. 이세돌은 지난 13일 커제 9단과의 특별대국에서 승리했다. 커제는 지난해 5월 더 강해진 알파고에 3전 전패를 당한 중국 최고수다. 대국 후 이세돌은 “지금은 알파고를 이기기 어렵지만 커제가 더 발전하면 이겨주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말했다. 인류 대표 기사들의 초인적, 아니 초기계적 도약을 기대한다.

글=천지우 차장, 삽화=이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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